▲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장강명 작가가 2015년 써낸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는 학력, 재력, 외모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이 평균 이하인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이 등장한다. 한국에서의 불행한 현재와 미래를 온몸으로 견디기보다 호주라는 낯선 공간에서의 새로운 삶을 선택한 주인공 계나의 삶이 대화 형식으로 그려지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현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폐부와 개인의 삶을 제한하는 수많은 족쇄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며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더 이상 견디고 버티는 삶이 아닌 스스로의 행복을 찾고자 하는 젊은 세대들의 목소리를 대신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장건재 감독이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도 출간이 되던 그해였다고 한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를 통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듬해의 일이다. 시기적으로 여러 변화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사회적으로도 많은 아픔이 있었던 때. 이 작품과의 만남은 감독에게도 공명하는 부분을 만들었고, 이를 영화화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처음은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안 프로젝트 마켓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빨리 행동에 옮긴 셈이다. 하지만 오랜 팬데믹 시간이 발목을 잡았고, 영화는 만으로 7년이나 흐른 후에야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열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상영작으로 선정되면서다.
02.
영화는 한국이 싫어서 뉴질랜드로 떠나고자 하는 계나(고아성 분)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대학 시절부터 7년이 넘게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지명(김우겸 분), 넉넉하진 않지만 평생을 열심히 살아온 부모님, 그리고 나름 대기업으로 평가받는 번듯한 직장까지. 현재 자신의 자리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전혀 없는 상황도 아니다. 다만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학벌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도 아닌데 까다롭기는 누구보다 까다로운 자신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서 여기에서는 더 이상 못 살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가볍지 않은 부분도 있다. 출근하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리는 지옥 같은 출퇴근길에 규칙과 공정의 틀까지 무너뜨리며 서로를 딛고 오르는 데만 여념이 없는 사람들.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납득할 수 없는 매일매일을 지나고 나면 마음은 금세 허탈해지고 만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도 몇 년이나 시험공부만 하며 쪽방에서 청춘을 소비하는 친구 경원의 모습과 낙후된 재개발 동네의 불안한 미래 역시 이 영화가 현실을 반영함과 동시에 이 문제가 개인만의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장면들이다.
이처럼 영화는 시작부터 원작이 표현하고 있는 현시대의 여러 문제들, 특히 청년 계층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여러 병폐와 부조리함에 대해 가감 없이 이야기한다. 계나가 한국을 떠나 향하게 되는 곳이라던가 영화의 결말의 부분처럼 소설과 다르게 각색이 된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영화라는 매체 위에서도 원작이 지적했던 사회 문제를 정확히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한국을 떠나고 싶어 했던 모든 이유의 장면들을 지나고 난 후에 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지친 몸을 던지는 그녀. 무엇도 기대할 수 없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 이 땅을 떠나고야 말겠다던 그 결심을 결코 반대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허물어져 가기만 하는 듯하다던 계나의 결심을 영화는 그렇게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