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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녀 살해 후 고문 영상 제작... 다크웹 범죄자 처단하는 법

[김성호의 씨네만세 855] <레드 룸스>

24.10.17 14:58최종업데이트24.10.1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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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크넷과 다크웹의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기존 온라인 통제 및 감시체계로는 규모와 구체적인 운영 방식이 파악되지 않는 다크웹의 존재감이 전과 비할 수 없이 확고해졌다. 기술의 발달로 개인의 일상을 온라인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된 환경 가운데 감시와 추적을 피하기 위한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으로서 다크웹이 기능하고 있다고 봐야야 할 테다.

기실 자유로운 공간처럼 보이는 온라인은 거의 전적으로 정부 주도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온라인상 이용자들의 행적이 낱낱이 추적될 수 있고 일부 사이트며 서비스에의 접속 또한 제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개인의 자유는 제한된다. 특히 기관 등의 추적을 받는 반체제 인사 등에게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의 필요가 커졌다. 다크웹의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트코인 등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자산거래가 본격 가능해지며 다크웹은 그 활용성이 크게 진작됐다. 다른 누구에게 추적당할 위협 없이 온라인에서 가능한 모든 작업을 해낼 수가 있게 됐다. 검색엔진에 포착되지 않는 고립된 다크웹 공간에서 특정된 사용자끼리 추적 없이 만날 수 있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다크웹과 관련해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테러 정보 교환, 마약 거래를 비롯해, 달러 위조 및 돈세탁,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다크웹 비판의 선두 주자가 되는 음란물·잔혹 영상 유통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웹에선 이뤄지지 않는 범죄가 수행되기도 한다. 반체제인사뿐 아니라 법망의 감시를 피하려는 각종 범죄자가 활동하는 공간이 되어준다는 비판에도 다크웹의 규모가 확장되리라는 데 이견은 없다.

10대 소녀 스너프 필름 제작, 화제의 재판

레드 룸스 스틸컷
레드 룸스스틸컷찬란

<레드 룸스>는 다크웹을 소재로 한 스릴러영화다. 10대 소녀 3명을 살해하고 그 고문 영상을 제작해 다크웹상에서 판매한 혐의로 범죄자 루도빅 슈발리에(맥스웰 맥카비-로코스 분)가 재판에 선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사건인 탓에 재판은 전국적 화제로 떠오른다. 재판을 보려는 이들이 연일 법정을 찾는 가운데, 켈리엔(줄리엣 가리에피 분)과 클레망틴(로리 바빈 분)이 있다.

증거는 두 개의 영상이다. 3명의 희생자 중 가장 어린 이를 제외하고 다른 둘의 고문 살해 영상이 이미 공개된 것이다. 다크웹을 통해 유통된 영상이 유출됐고 이를 경찰이 입수하며 사건은 본격화한다. 아직 마지막 희생자의 영상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검찰은 앞의 영상을 통해 범인이 슈발리에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변호인은 푸른 눈에 평범한 체격을 가진 이가 캐나다 전역에 수천 명은 족히 될 것이라 반박한다. 열띤 공방이 예고되는 상황 가운데서 법원을 찾은 이들의 반응 또한 첨예하게 엇갈린다.

영화는 어느 한쪽의 편에서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베일에 싸인 주인공의 사연을 조금씩 드러내며 긴장감을 점층시키는 편을 택한다. 슈발리에와 사건은 주된 관심이긴 하지만 영화가 중점적으로 내보이는 바가 아니다. 주는 도리어 법원을 찾은 켈리엔과 클레망틴, 두 여성 사이에 빚어지는 관계성이다.

켈리엔은 여러모로 독특한 인물이다. 도심 고층 아파트에 홀로 살아가는 그녀다. 재정상황이 풍족한 듯 씀씀이도 거침이 없다. 유명 브랜드 모델로 활동하는 한편, 컴퓨터도 능숙하게 활용해 온갖 작업을 진행한다. 간단한 해킹은 물론이고 다크웹을 통해 진행되는 온라인 포커게임에서도 곧잘 돈을 벌 정도. 탁월한 두뇌에 냉철한 판단력까지 갖춰 증권거래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니 그야말로 현대인의 워너비 삶이 따로 없다.

켈리엔이 슈발리에 사건에 왜 관심을 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녀가 매 재판에 출석해 주의를 기울이고 남는 시간엔 돈을 벌고 운동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비출 뿐이다.

뜨겁고 차가운 두 여자의 마주닿음

레드 룸스 스틸컷
레드 룸스스틸컷찬란

그런 켈리엔의 삶에 클레망틴이 뛰어든다. 제 앞에 들이대진 마이크에 대고 '그저 관심이 있어 왔다'고만 말하는 켈리엔과 달리 클레망틴은 제가 가진 온갖 생각을 열정적으로 떠들어 댄다. 특히 그녀는 슈발리에에게 크게 동조하는 듯, 범인이라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온갖 비난을 사는 그의 상황을 대변한다.

영화는 온도가 없는 듯한 켈리엔과 불안하지만 뜨겁기 짝이 없는 클레망틴이 연결되며 일어나는 변화를 포착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클레망틴에게 켈리엔이 제 집에 함께 머물자 제안하고 이런저런 도움까지 주는 과정이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둘의 관계 가운데서 켈리엔은 차츰 클레망틴을 배려하고 마음을 쓰게 된다. 관계 맺음에 익숙한 듯한 클레망틴 또한 굳이 그를 사양하지 않는다. 그렇게 둘은 이색적 친구가 된다.

둘은 가진 것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나 성격도 전혀 다르다. 잘 나가는 모델이며 해커에 포커 고수이고 증권거래로 풍족하게 돈을 버는 켈리엔이다. 그녀에게 돈이란 컴퓨터 안에 든 숫자일 뿐이다. 반면 클레망틴은 평범한 소녀다. 우연히 보게 된 슈발리에에게 과하게 몰입할 만큼 감정적이고, 사회에선 이렇다 할 역할도 쓰임도 찾지 못한 흔한 10대다. 그렇게나 다른 둘이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은 영화에 낯선 긴장을 불어넣는다.

감독 파스칼 플랜트는 범죄 영상, 즉 10대 소녀를 잔혹하게 고문하고 강간하는 범죄의 영상이 다크웹에서 공공연하게 거래된다는 설정으로부터 영화를 전개해 나간다. 평범한 이가 다크웹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기에 켈리엔과 같은 특별한 재주를 갖춘 이를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그녀는 자연히 평범한 누구와는 다른 자질과 성격을 갖춘 이로 묘사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도덕은 이곳에 없다

레드 룸스 스틸컷
레드 룸스스틸컷찬란

켈리엔 곁에 그녀보다 훨씬 더 정의로운 듯 보이는 평범한 이를 두는 건 극적인 대비의 효과를 낳는다. 클레망틴은 제가 믿는 것이 이뤄져야 한다는 정의감에 불타지만 실제 세상을 잘 이해하지도,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도 없다. 정의감이 있는 소시민이 현실과 마주해 어떻게 좌절하게 되는지가 영화의 또 다른 관심사다.

<레드 룸스>는 클레망틴이 아닌 켈리엔을 통해 나름의 정의를 구현한다. 그 방식은 전혀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이지 않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마지막 영상, 즉 세 명의 피해자 중 가장 어린 소녀의 피해영상이 다크웹을 통해 경매에서 다뤄진다는 게 영화의 이색적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켈리엔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에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비트코인으로 치러지는 경매가는 끝도 없이 치솟아 현재가로 대략 십수억 원에 이를 만큼 올라간다. 어려움을 뚫고 켈리엔은 그를 마련하고 마침내 영상을 얻어낸다.

그 영상엔 경찰과 검찰이 특정하지 못한 범인의 용모가 드러나 있고, 그를 통해 정의가 구현된다. 요컨대 켈리엔이 막대한 개인 자금을 들여 다크웹을 통해 얻어낸 영상이 온 세상이 씹고 떠드는 사건을 근본적으로 해결한다. 또한 영상을 찾아 제 딸을 편히 잠들게 하겠다던 피해자의 부모에게도 나름의 안식을 준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켈리엔을 도덕적으로 그리지 않는단 점이다. 차라리 그 반대에 가깝다. 관객이 흔히 생각하는 정의는 켈리엔보단 설익었을지언정 클레망틴에 가까운 것이다. 제가 믿는 악에 분노하고 선을 지지하는 것, 세상 사람들은 그를 정의롭다 여긴다. 그러나 켈리엔의 왜곡된 욕망이 도리어 사건을 해결하고 피해자를 위무하며 진실을 드러낸다는 걸 영화는 꿋꿋이 드러낸다. 정의로움은 감정이나 동기나 욕구, 발산되는 감정이며 태도 따위가 아닌 결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냐는 도발적 질문을 이 영화가 해낸다.

정의와 부조리, 그 복잡한 표정을 읽어내기

레드 룸스 포스터
레드 룸스포스터찬란

<레드 룸스>가 어떤 영화인가를 간명하게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범죄와 그를 저지른 이, 그를 잡아넣으려는 이들의 분투를 영화는 그저 관망하듯 떨어져 바라볼 뿐이다. 각자의 이유로 그에 주목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가 영화의 주된 관심이지만 낯설면서 정적이기까지 하다. 캐릭터가 지닌 온도마저 섬세하게 표현해낸 두 배우의 연기가 도리어 영화의 주제에 효과적으로 다가선다. 일을 해소하는 지극히 이성적인 접근에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없다는 사실이, 감정이 실린 검사며 클레망틴의 도전이 일일이 꺾이고 무너져 내린다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만듦새가 좋은 영화다. 배우의 연기는 물론, 섬세하게 감정과 상황, 주제의식까지를 부각하는 연출이 단연 인상적이다. 촬영과 편집의 쓰임 또한 매우 적절하여 배우에게서 드러나는 온도의 차이가 테이크와 신 사이에도 묻어난다 느껴질 정도다.

영화의 진짜 공포는 그저 스너프 필름의 역겨움이라거나 그를 거래하는 다크웹의 범죄, 인간들의 그릇된 욕망 정도에 있는 게 아니다. <레드 룸스>는 우리가 끝끝내 기대하는 고정관념, 즉 정의란 인간적이고 뜨거운 욕구로부터 출발하리라는 기대를 부숴버린다는 점에 있다. 기형적인 욕구와 욕망, 또 때로는 법과 질서를 우습게 무시하는 태도가 도리어 정의에 가까이 다가설 수도 있다는 사실을, 평범한 소시민의 정의감이 얼마나 쉽게 이용되고 왜곡되어 진짜 정의로부터 괴리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레드 룸스>의 불편은 그를 이해하는 이들에겐 점차 공포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정말이지 악도 선도, 부조리와 정의마저도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띄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레드룸스 찬란 파스칼플랜트 줄리엣가리에피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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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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