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지>의 한 장면. 헛간에서 브리짓(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의 슬픔을 보듬는 리지(클로에 세비니 분). 영화는 기댈 곳 없는 여성들의 연대와 파국, 마침내 이뤄진 관계의 해체를 도식적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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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브리짓과 보든 가의 세 여자는 도식적이라 할 만큼 선명한 역할을 가졌다. 리지가 억압에 맞서 직접 코르셋을 벗고 도끼를 치켜드는 존재라면, 브리짓은 그에게 동화되어 범죄를 공모했으나 끝내 도끼를 내리치지 못하는 현실적 인물이다. 극중 리지가 젖소라며 비난한 애비는 젖소와 같은 가축이 인간에게 그러하듯이, 앤드류의 세상에 기대어 살면서 그의 지배를 공고화하는 존재다. 리지로부터 재산을 노리는 존의 의도를 들었으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엠마는 애비의 전 단계나 다름없다. 리지가 노골적으로 애비를 경멸하고 엠마와 소통하지 않은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지배하는 집 안에서 정당한 제 권리조차 찾지 못하는 리지의 삶은, 그대로 남성의 세계에 억눌린 여성의 이야기가 된다. 영화 속 남성인 앤드류와 존은 오로지 성별과 신분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제 것이 아닌 것을 탐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집 바깥의 이들은 이런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임으로써 통용되는 어떤 질서를 빚어낸다. 영화는 '리지가 재판에서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보든 가의 자제가 그런 흉악한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는 배심원단의 판단이 이유였다'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이 역시도 남성들이 세운 질서가 진실을 억눌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엔딩으로, 영화의 지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선택이다.
지나치게 도식적이어서 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영화는 이처럼 명확하게 권력과 억압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부모까지 살해한 리지의 비인간적 행동 이면에는, 남성들이 만든 억압의 구조가 있었음을 말한다. 나아가 그와 같은 억압이 앤드류나 그에 동조하는 남성들의 안위마저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 영화의 주장이다.
최근 우리 사회 뿌리 깊은 성 차별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반면 일각에서는 이러한 담론을 제기하는 집단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보이기도 한다. 한 쪽에는 힘없는 이들에게 여전히 코르셋을 입히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코르셋을 벗고 도끼를 들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자들도 있다.
'도끼를 든 리지'를 마주하기 전에, 우리가 어떤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애비와 엠마, 브리짓의 선택을 넘어 앤드류와 리지에게 손을 내미는 방법을 이 영화가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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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