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감독이 찍어낸 세 편의 단편을 한데 모았다. 시간차를 두고 펼쳐지는 세 가지 이야기를 관통하는 건 한 여자다. 배우 이명하가 연기한 여자는 처음엔 헤어진 옛 연인이었다가, 다음은 남자로부터 관심을 받는 여자이고, 마지막엔 이제는 그 감정마저 파묻힌 옛 연인으로 돌아간다.

세 편의 영화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함께 도심을 걷는 이야기, 작업이 끝난 뒤 마음에 품은 여자에게 말을 붙여보는 남자의 이야기, 마지막은 친구가 죽고 난 뒤 장례식장에서 만난 인연들과 가볍게 술 한 잔을 나누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얼핏 대단할 것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 사이로 미묘한 감상이 일어나니 그건 영화를 보는 이와 영화 속 인물들 사이에 공유되는 소탈하지만 한때는 절절했을 감정들 때문일 테다.

'광화문 로맨스'를 표방한 영화다. 1988년생 젊은 감독 김태양은 앞서 발표한 두 편의 단편 '달팽이'와 '서울극장'에 더해 새로 찍어낸 작품 '소우'를 붙여 장편영화 <미망>을 발표했다. 앞서 주목받은 작품을 거의 그대로 1막과 2막으로 붙였으나 3막과 함께 이어보도록 함으로써 전에는 선명히 드러나지 않던 감상이 증폭되는 효과를 일으킨다.

중첩되며 깊어지는 이야기의 맛

 영화 <미망> 스틸컷
영화 <미망> 스틸컷영화사 진진

처음 두 편은 서울 종로와 을지로, 청계천변, 광화문 일대를 배경으로 남녀의 미묘한 감정에 주목한다. 우연히 만난 헤어진 연인 사이 남자의 시선을 통하여서 아직은 묵은 감정이 남았음을 드러내는 듯하다가, 다시 그 위에 그가 새로 만나는 여자와 걷는 모습을 더하여 관계와 감정이 일어서고 쇠하며 돌고 돌아 순환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라지는 극장과 새로 일어나는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두 번째 작품은 실제 폐관에 이른 서울극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도심을 함께 걷는 청춘남녀의 복잡하면서도 확연한 감상이 보는 이에게 은근한 멜로물처럼 작품을 대하도록 한다. (관련기사: 사라진 한국영화의 상징, 그 정취가 여기 담겼다 https://omn.kr/2axap)

<미망>의 시작은 주연배우 이명하와 감독 김태양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비롯됐다. 김태양이 극 중 첫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종로 근처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을 무렵, 알고 지내던 배우 이명하가 서울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가다가 뒤에서 저를 툭툭 쳤다던가. 그렇게 함께 걸으며 둘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뜻을 모았다는 것이다. <미망>의 출발이 된 첫 단편 '달팽이'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이명하가 주연으로 캐스팅된 건 지극히 우연하면서도 그 우연을 그저 우연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이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4년에 걸친 촬영,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영화 <미망> 스틸컷
영화 <미망> 스틸컷영화사 진진

김태양은 영화에 대해 "낮과 밤이 두 번 반복되는 구성인데, 3막까지 촬영하게 되면서 (극 중 인물들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고 설명한다. 실제 촬영이 진행된 것도 2019년부터 2022년 겨울까지였으니 무려 4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것이다. 실제 배우들이 나이가 들고 그 분위기가 변화한 만큼 영화 속 인물들의 자연스런 성숙과 나이 듦이 그대로 영화에 반영된다.

이명하는 "김태양 감독은 평소에도 많은 것을 예쁘고 소중하게 보는 감독"이라며 그 시선이 자연스레 작품에 묻어났다고 말한다. 함께 합을 맞춘 배우 하성국 또한 "'달팽이'를 보면 20대 때 김태양 감독이 보던 공간과 시간 같은 것들에 대한 시선이 그대로 담겨 있어서 좋았다"고 덧붙인다. 만든 이의 시선이 고스란히 영화에 묻어 났다는 뜻이겠다.

영화 속 세 편의 이야기 가운데 통상의 멜로물에서 찾을 수 있는 감상과 감정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처음 것은 이미 끝나버린 지 오래된 관계이고, 다음 것은 좀처럼 시작할 수 없는 장벽만이 거대하게 보일 뿐이다. 심지어 마지막 것은 남녀 모두에게 한때 있었던 감정이 완전히 사그라들어 멜로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멜로라 우기는 이 영화

 영화 <미망> 스틸컷
영화 <미망> 스틸컷영화사 진진

그러나 이 가운데 한때나마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이 있었고, 또 미련이었다가 공감과 이해였다가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마음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첫 에피소드의 후반부에서 남자의 현 여자친구 역을 맡은 정수지는 "처음 감독님으로부터 시나리오를 받을 때 글을 쓴 걸 보며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면서 "카페에서 직접 캐릭터 설명을 들었는데, 그때 감독님의 개인적인 연애사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 여자의 의연함이나 담담함을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말하자면 사랑이 피어나지 않는 듯한 이야기 곳곳에서 진짜배기 사랑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성국은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더한다. 그는 "김태양 감독의 시선은 사건에 집중하기보다 사건이 지난 뒤 수면 위에 이는 물결 같은 걸 보는 듯하다"며 "포괄적으로 볼 때 로맨스가 포함된 드라마가 아닌가 한다"고 부연한다.

김태양 감독은 직접 <미망>이 로맨스 영화라 주장한다. 그는 "일반적으론 사랑이 이루어지는, 결실을 맺거나 헤어지거나 사랑의 생로병사를 다루는 그런 로맨스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면서도 "제가 착안한 건 사랑의 과정이나 이별이 아니고 타이밍이 어긋나는 순간에 대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타이밍이 맞으면 이뤄질 것도 안 맞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들었던 마음이 사라지거나 그런 게 아니다"라며 "헤어진 연인이 있을 때 그 친구에게 잘못한 걸 다른 연애에선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일도 생각해 보면, 이전 연인에게서 전이되고 묻어난 것이 아닌가. 이런 것도 로맨스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세 편의 단편 사이를 메우는 상상의 힘

 <미망> 포스터
<미망> 포스터영화사 진진

<달팽이>와 <서울극장>은 각각 완성된 단편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각 영화의 서사 또한 서로와는 상관없이 일어나고 각 인물의 삶 또한 개연성 있게 이어지지 않는다. 인물들은 어느 순간 각자의 삶 가운데 끼어들듯 만나고 헤어질 뿐, 지속적인 관계 맺음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미망>은 세 편의 단편을 붙여 연달아 보도록 함으로써, 시간적으로 가장 뒤의 것, 즉 '소우'에 이르는 각 인물의 사정을 떠올리도록 한다. 그중엔 다른 이와의 관계가 귀찮다던 이가 다른 이의 아이를 부모처럼 키우기도 하고, 철없이만 보였던 사내가 친구의 장례 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속울음을 우는 장면도 있다. 삶이 이들을 어디로 인도할지 알 수 없으나 관객은 각각의 인물의 삶 가운데 어느 세 지점을 무작정 들어내 관찰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 와중에 보이는 건 일면 성장이기도 하고, 나이 듦이기도 하다. 영화는 흔한 성장영화와 달리 각 인물의 삶 가운데 다른 이와 부딪히고 마주하며 얻은 흔적들을 차분히 내보인다. 말하자면 어느 사랑은, 또 어느 우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관계가 있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오래도록 남는 다른 이의 흔적, 그 관계의 발자국을 <미망>은 지긋이 지켜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미망 영화사진진 김태양 이명하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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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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