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첨벙> 스틸컷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첨벙>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세은(하승연 분)은 새벽같이 수영장으로 향한다. 누구보다 먼저 아침을 여는 사람, 청소원이다. 어느 날 세은은 같은 건물에서 수영 강사로 일하는 친구 수경(김무늬 분)을 만난다.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강사증을 목에 걸고 자신감마저 넘쳐 보이던 그의 모습. 어쩐지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두 사람은 과거 함께 수영 선수 생활을 했던 사이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 사람은 탈의실에서 청소하는 사람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여전히 수영장의 레인 위에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직업의 귀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꿈에서 멀어진 사람과 꿈의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영화 <첨벙>의 진짜 이야기는 세은과 수경이 마주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다시 시작된다. 3년 전 남편 종수(신범철 분)를 만나 결혼을 하며 현실적인 이유로 수영을 그만두어야 했던 세은과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자 결혼까지 미뤘지만 결국 실패하고 지난해 결혼과 함께 지금의 스포츠 센터에서 수영 강사가 된 수경의 만남이다. 두 사람은 모두 꿈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강사가 된 수경조차 자신이 꿈꾸던 자리는 아니다. 있지도 않은 아이가 있다고 말하는 세은의 감춰진 마음은 그다음이다.

02.
극 중 두 인물은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다. 놓여있는 문제는 다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동일하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경력 단절이다. 허다희 감독은 두 이물을 서로 마주 보는 자리에 위치시킨다. 아이를 갖기 위해 경력을 포기해야 했던 여성과 임신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될 위기에 놓인 여성이다. 하나의 문제 위에서 서로 다른 모습의 어려움이 존재할 수 있음을 정확히 포착해 낸 설정. 유사 소재를 다루고 있는 다른 작품에 비해 명확한 강점을 보이는 지점이다.

이 지점을 표현하기 위해 세은이라는 인물이 결혼과 출산 앞에서 주체성을 잃어가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부분 또한 흥미롭다. 과거 선수 시절에는 생리를 이유로 훈련을 거부할 정도로 강단 있고 인물이었던 그녀는 남편과 산부인과, 시험관이라는 현실로 인해 자기 뜻을 오롯이 드러내지 못하고 삼키는 모습으로 지금 표현되고 있다. 수경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수영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던 남편 종수(신범철 분)의 태도가 현재의 모든 상황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첨벙>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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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나 여기 코치 준비하고 있어. 그런데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대."

그런 그녀에게 영화가 나아갈 최소한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장면은 센터에 수영 강사 육아휴직 대체 인력 공고가 붙는 지점이다. 세은은 서랍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수영복을 하나둘 꺼내 입어보기도 하고, 중고 수영복을 사기도 하며 감춰 놓았던 수영에 대한 꿈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수경의 강사증(출입증)을 훔친 세은이 아무도 없는 새벽 시간의 수영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한 장면이다. 오프닝 신에서 어둡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청소를 이어갔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에게 수영이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모든 일이 상상처럼 풀리는 것은 아니다. 들뜬 마음으로 이력서를 들고 찾아간 데스크에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공고가 취소되었다고만 알려오고, 수영을 멈출 수 없었던 세은은 강사증을 훔친 사실을 수경에게 들키게 된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그는 수경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마저 알게 된다. 강사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임신을 피해야 했던 수경과 아이를 갖기 위해 수영을 포기했던 세은의 교환이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감춰줘야 할 일이 하나씩 생긴 셈이다. 이 장면의 완성을 위해 두 인물은 처음부터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04.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세은이 수영을 포기하고 센터의 청소부 자리를 받아들여야 했던 이유, 수경의 강사증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지금 강사로 일하고 있는 수경조차 자신의 임신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이유는 모두 그들이 여성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순리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상황을 사회적으로 거부당하고 배척당하기에 감추거나 피할 수밖에 없는, 그로 인해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속여야만 하는 처지에 내몰리게 되는 인물이 이 작품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현실의 문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극적 장치를 조금 더 강하게 죄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중심인물인 세은은 그 모든 문제로부터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며, 수경은 그 곁에서 이를 한 번 더 강조해 내는 역할로 실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수경이 임신으로 강사를 그만두고 그 자리의 공고를 통해 세은이 기회를 얻게 되는 것에 연대와 극복의 의미보다 안타까운 감정이 먼저 앞서는 것은 분명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첨벙>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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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저는 장점이 하나 있습니다. 육아 휴직 없이 끝까지 일할 수 있고요. 생리휴가도 필요 없습니다. 폐경이 제 장점입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는 세은이 영화의 전반에 걸쳐 자기 발목을 붙잡고 있던 모든 상황을 단번에 뚫고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직 사회적으로는 쉽게 이야기할 수 없고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되기 쉬운, 잘못된 통념과 관습을 무너뜨리는 장면이다. 물론 극 중의 활용을 되짚어보자면, 그렇게 해서라도 수영장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세은의 모습이 조금은 안타깝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허다희 감독도 이를 모를 리 없다. 다만 이런 장면의 구성과 표현이 가능한 것에는 이상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지 않게 바라볼 줄 알고, 자연스러운 일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줄 아는 태도와 자세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첨벙>의 시작에서는 분명 수영에 대한 꿈을 다시 찾고자 하는 여성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마지막에서는 여성의 자연스러운 상태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과 시도가 그려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롯한 여성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길고도 먼 여정이 이 작품 속에 담겨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첨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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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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