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 란> 스틸컷
넷플릭스
<전, 란>은 이와 같은 모순을 전면에 내세우며 강동원의 액션을 주무기로 쓰는 작품이다. 강동원이 전문적인 액션배우는 아니라지만 그 빛나는 외모에다 길쭉한 기럭지로 칼질이든 발차기든 할라치면 멋이 좔좔 흐르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앞서 많은 작품이 부실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를 톡톡히 노렸고, 작품이 괜찮다면 시너지가 배가됐음을 많은 이가 기억한다. <전, 란> 또한 노골적으로 그에 기대려 든다.
다만 영화는 강동원을 위시한 배우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점에서 실망스럽다. 우선 캐릭터며 드라마, 주제의식 등 여러 부문에서 깊이 고민한 흔적이 없다. 자식을 빼앗긴 아버지는 성질 급한 아들이 단 며칠 만에 탈출해 집에 가니 목을 매달고 죽어 있다. 아들이 살아있는데 아버지는 목숨을 스스로 내버린다. 독한 아들 천영이 자기를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또 하나 남은 피붙이를 끔찍이 대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감히 그럴 수가 없었을 테다. 물론 그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해서 좋은 건 단 하나다. 현 시점의 천영을 쉽게 설명해낼 수 있다는 것, 그뿐이다.
천영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는 이들의 동기며 욕구 또한 얼마 드러나지 않는다. 선조를 완전무결한 지도자로 여기는 고지식한 양반이 백정이며 천민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그들이 왕을 함부로 표현하는 모습 또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전란을 함께 헤쳐 왔을 이들은 또 별것 아닌 이유로 갈라져 엇갈린 운명을 나눠지게 된다. 온갖 못 볼 꼴을 다 보며 7년 전쟁의 막판까지 버텨낸 이들이 한 순간 도적떼로 돌아서기도 한다.
신분제의 부조리는 개별 캐릭터의 말로만 드러날 뿐 드라마로 보여지지 않는다. 대신 매를 맞는 천영의 에피소드 외에 다른 이들의 모습에선 그와 같은 곡절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각 인물은 백정이고 노비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겪었을 법한 그림자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양반과 노비가 마치 한 데 어우러져 살아온 양 문화적 충돌 또한 겪지 않고 무리지어 살아간다. 한두 시간 전엔 서울 시민이었을 배우들이 조선의 노비와 양반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진다. 캐릭터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배역만을 나누어 준 기색이 너무나 역력하다.
국왕 선조는 실제에 비해 너무나도 무능하고 욕심 많은 인물로만 그려진다. 더없이 인간의 심성을 잘 알고 활용한 노회한 정치꾼이 영화에선 세상 물정 모르고 권위만 세우려는 노욕의 결정체로 존재한다. 전쟁 가운데 했을, 하다못해 권력을 지키려 고심했을 나름의 고충 또한 전혀 비춰지지 않는다. 그는 그저 신분제 위에 서 있는 무능하고 파렴치한 악의 화신일 뿐이다.
영화는 온갖 부조리를 네 개의 장에 각각 나누어 넣은 것처럼 흘러가지만 실상은 서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모아도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와중에 액션은 부실하고 오로지 푸른 옷을 차려입은 강동원의 존재만이 부각되는데, 그 사이에서 왜 조선이고 왜란이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소실되고 만다.
극장에서 숨죽이고 러닝타임을 집중해야 하는 일반 영화와 달리 OTT 영화는 틀어놓고 아무 일이나 하며 봐도 되는 편한 콘텐츠란 시선이 있다. <전, 란>은 그런 영화여서 고민이 거의 엿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산업의 주요한 축이었던 극장의 극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나을 건 없고 모자란 건 많은 이 작품에 어째서 개막작의 영예를 안긴 것인가. 나는 도무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