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여공의 노래 포스터

▲ 조선인 여공의 노래 포스터 ⓒ 시네마달

 

다큐멘터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제목을 두고 프로듀서와 감독이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근간이 된 책의 제목을 따긴 따되 '조선인 여공의 노래'라 할 것이냐, 한 글자를 빼 '조선 여공의 노래'라 할 것이냐를 고민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 터 잡은 재일교포 학자가 1980년대에 낸 책에선 조선인 노동자는 개별적 타자성을 강하게 지니지만, 2020년대 한국에서 볼 때는 집단적 특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시절 조선인의 고통은 조선 비극의 일환이고, 곧 조선의 고통, 다시 그 후신은 한국의 상처로 집단화되어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오늘의 한국인은 과거의 아픔을 이렇게 접하고 소화하는 데 익숙하다. 책의 제목에서 유독 '인'자를 뺄지를 두고 고민한 데는 이러한 영향이 있었을 테다.

그러나 제작진은 끝내 제목을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왜일까.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약 반 세기 가량 일본 오사카 방적공장 노동을 떠받친 조선인 여공들의 사례가 한 뭉치로 뭉뚱그려져 해석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일 테다. 책도, 다큐멘터리도 그 개별적 고통을 사례를 추적하여 구체적으로 짚어낸다. 그 고통들이 결코 병합되고 통계나 수치쯤으로 다뤄지길 원치 않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은 조선이 당한 일이기 이전에 조선인 여공들이 당한 일이라고 나누어 살피는 것이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 시네마달

 
비하와 차별, 착취 속에 견뎌낸 시간들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그와 같은 영화다. 앞선 글에서 적었듯 작품은 생존한 여러 할머니의 인터뷰와 또 이미 죽었으나 김찬정 선생이 모아 펴낸 책에 남겨진 기록들을 통하여 구체적 사례를 재현한다. 대부분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벌이도 충분하고 기숙사 생활은 쾌적하며 즐겁다는 말에 속아 낯선 일본에 떨어진 소녀들이 실을 잣는 방적공장에 배치된다. 목화솜으로부터 실을 뽑는 작업은 매우 고된 것이다. 약한 실이 툭하면 끊어지고, 목화에서 나오는 먼지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반복작업을 1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교대로 반복하다 보면 정신이 명료할 수가 없다. 잠이 필요한 십대 소녀들에게 이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그리하여 때때로 졸다가 실을 끊어 먹으면 관리자들에게선 곧장 호통과 폭력이 날아든다. 소녀들에게 실을 끊어먹는 건 곧 두려움, 공포다.

먼지 풀풀 나는 공장 환경은 그보다도 나쁘다. 많은 여공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 이보다 반세기도 더 뒤의 한국 방직공장들에서도 많은 여공이 폐병으로 죽지 않았던가. 불치였던 폐결핵으로 수많은 여공들이 쓰러져 죽어갔다. 피를 토하는 고통 끝에 하나둘씩 여공이 죽어나가면 조선에서 또 다른 여자아이를 불러다가 채우면 그만일 뿐이다.

조선인은 돼지다. 조선인이 사람이라면 잠자리도 새인 것이다. 그와 같은 조롱이, 차별이, 비하가 공공연히 들려오던 시대였다. 그와 같은 차별이 어찌나 서러웠는지 여공들이 간직한 그 이야기가 김찬정 선생의 책으로써, 또 여러 연구의 기록으로 남아 다큐 안에 심겼다. 그를 통하여 한국의 오늘이 비로소 옛 고통을 알게 되니, 그간 우리가 그 기록에 어떤 기여도 하지 못했음이 민망하게 닥쳐든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 시네마달

 
그러나 고통에서 끝내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오로지 고통만을 담는 것은 아니다. 그리 길지 않은 다큐 가운데는 제법 결연하고 다부진 순간이 없지 않다. 100세를 앞둔 할머니는 당찬 성정이 엿보이는 목소리로 제 과거를 떠올린다. 너무 늦게 청한 인터뷰로 기억이 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제작진 앞에, 다섯에 일본에 들어와 십대를 꼬박 방적공장에서 보낸 과거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말한다.

그러며 어제 그제 일은 새까맣게 잊는다니 그 유머 아닌 유머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직까지 일본인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 한국어와 일본어가 절묘하게 뒤섞인 진짜 한본어로 말하는 그녀에게서 나는 스스로를 지탱하는 생, 그 자체의 생명력을 엿본다. 치매를 앓고 있다는 그녀의 인터뷰는 이원식 감독에게도 남다르게 다가온 모양으로, 그는 이 인터뷰를 영화 속에 꽤 인상적으로 부각한 데 이어, 상영이 끝난 뒤 질의응답 자리에서도 다시금 언급한다.

이 감독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여공으로 일하셨던 당시를 알려달라고 청하여 어렵게 오랜 시간에 걸쳐 만났을 때 그분들이 몹시 좋아하셨다"며 "젊고 아름다운 시절 여공으로 일했던 트라우마가 도리어 삶의 자양분이 되었단 이야기를 전해주실 때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 같은 영향일까. 감독은 영화 후반부를 제법 기개 있는 장면으로 꾸민다. 다큐 내내 대역을 맡아 글을 낭독하던 배우들을 활용하여 그들이 업체를 상대로 노동쟁의를 벌이는 과정을 잡아내는 것이다. 실제 있었던 사례들로 꾸려진 이 같은 장면들은 여러 공장에서 개별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일어난 조선인 여공 중심의 집단행동이다.

때는 1930년대, 한반도에서도 일제의 폭압이 공공연히 이뤄지던 시절이다. 1930년 오사카 인근 기시다와 방적공장에서 여공들이 파업에 돌입한다. 사유는 부당한 임금 삭감. 노동쟁의가 무엇인지, 파업은 어떻게 이뤄내야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조선인 여공들이 사측의 폭압에 마침내 저항을 시작한 자연발생적 쟁의였다고 전한다. 특히 이때 투쟁에선 일본인 노동자들의 지지와 참여까지 끌어냈다니 그 성취를 기록할 만하다.

1931년엔 오사카 이쿠노구 마쓰모토 고무공장에서 쟁의가 있었다고 했다. 1932년엔 오사카 연사 공장에서 기계의 실을 끊고 파업에 돌입한 사례가 있었다. 조선인에게 우호적인 일본인 노동자의 해고를 철회하라며 일어난 저항까지 있었다니, 조선인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의식수준이 보통을 넘어서 있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 시네마달

 
한국이 조선인 여공의 노래를 들어야 하는 이유

노동자의 처우 개선, 일본인 노동자와의 차별 해소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한 이들에겐 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까. 때는 군국주의에 물든 일제 강점기, 그것도 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른 오사카였다. 일본인도 아닌 재일 조선인, 심지어 여성들의 파업이다. 일본이 법대로 대응하지 않은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사측은 상애단이란 조직을 고용해 여공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일본 경찰들은 방관을 넘어 여공들에게 폭력과 고문까지 자행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참혹한 이야기를 차마 낱낱이 담아내지 않는다. 그럴 수 없었으리라. 대신 영화는 소녀들이 중심이 된 그 파업 가운데 한 장면들을, 생존자들이 기억하고 기록이 외면하지 않은 단서를 바탕으로 극화시켜 표현한다. 상애단에게 된통 얻어터진 여공들이 몸을 일으켜 귀환하는 장면이다. 길게 땋은 머리에 붉은 댕기를 단 소녀들이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선 모습을 영화는 인상적으로 잡아낸다.

얼굴엔 멍이 들고 몸엔 상처가 났지만 그네들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당당하다고, 영화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까. 그것이 진실의 전부가 아니래도 좋다. 적어도 진실의 일부이긴 했을 테니까. 많은 고민 끝에 그 고통을 낱낱이 꺼내어 전시하는 대신, 이를 택했으리라고 나는 믿는 것이다.

이원식 감독이 말한다. "극영화 시퀀스를 처음부터 의도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고. 그는 "저도 모르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조금 더 편하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다"며 "감정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어서 극영화 시퀀스를 선택했고 영화로 만들었다"고 전했다.

강하나 배우도 말한다. "(오사카에서 사는 재일교포지만) 부끄럽게도 조선인 여공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몰랐다"며 "영화 촬영을 앞두고 증언집을 읽으며 알게 됐고 소녀들이 데모를 일으키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살아나간 소녀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고 설명했다.

정진미 프로듀서는 말한다. "어머니들의 삶을 생각하게 됐다"고. 정 프로듀서는 "저도 세 아이의 엄마로, 어머니의 삶, 그 시대를 딛고 일어선 증언, 그런 것들이 큰 감명을 줬고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를 줬다"면서 "지금 제가 사는 삶이나 다른 어머니들의 삶과 달리 훨씬 수고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힘차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좋은 영향력을 주지 않을까"하고 기대했다.

이들의 말과 기대와 평가가 하나하나 틀리지가 않다. 백 년 전 여공들의 이야기가 오늘에 전하는 감상이 분명히 있다. 그 시절 여공들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발굴 않고, 또 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외면했던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에. 또 오늘의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타국의 여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오늘의 한국에서 반드시 울려퍼져야 한다. 그럴 가치가 분명히 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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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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