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철봉하자 우리>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는 미학과 출신으로 만년 백수로 살아온 석주(손수현 분)에게 격변의 시기와도 같았다. 단기여도 쉽게 구할 수 있던 일자리는 거리 두기 등 정부의 각종 정책 이후 자취를 감췄다. 코로나에 걸리면 양성 반응이 뜬 코로나 키트를 중고 거래로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동네 문화센터의 모든 강좌가 현장 강의에서 온라인 강의로 변경된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다행스러웠다. 인터넷으로 강의해 본 적이 없는 강사들은 카메라 앞에서 말조심하는 법을 몰랐고, 정식 공개 전에 이런 말실수를 편집할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해졌다. 석주가 맡은 일이다.
같은 문화센터의 클라이밍장에서 처음 만난 맹지(송예은 분) 또한 석주가 맡은 동영상 강의 강사 가운데 한 명이다. 종이접기를 가르치고 있는 그녀 또한 코로나 영향으로 현장에서 화면 속으로 옮겨왔다. 석주가 맹지를 기억했던 건 또래이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화면 너머에 있는 자신에게 사과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맹지)가 기르던 흰 고양이 소금이는 이따금 화면 사이를 횡으로 넘나들었다. 사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녀의 강의는 모두 송출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석주는 화면 속의 맹지를 알지만, 화면 속의 맹지는 석주를 알지 못하는 상황.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이 친구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목충헌 감독의 영화 <철봉하자 우리>는 두 인물 석주와 맹지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친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힘겨운 시절을 함께 지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관계의 교집합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에피소드는 지나가 버린 시절의 특수성과 살아가는 동안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보편성을 모두 아우르며 두 사람의 모양을 완성해 간다. 이 작품은 '계간 문학들' 2024년 봄호에 실린 예소연 소설가의 단편소설 <우리 철봉하자>가 원작이다. 소설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던 코로나 시기의 배경적 설정이 더해졌고, 크로스핏이던 두 사람의 공통분모가 클라이밍으로 바뀌는 등의 몇몇 지점의 각색이 있었다.
02.
석주와 맹지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클라이밍을 하기에 팔힘이 약해도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몸을 풀기 위한 풀업도 하나 제대로 할 수 없고, 홀드를 몇 개 잡고 오르기도 전에 계속 떨어진다. 코로나로 수강생이 두 사람뿐이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같이 운동하지 않겠냐는 맹지의 제안에 석주가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이유다. 물론 실제로 늘어나는 것은 친목이라는 명목의 술자리다. 두 사람의 팔힘은 여전히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이를 계기로 친구가 된다.
이 장면 뒤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석주가 즉석만남 앱을 지우고 말을 걸어오는 낯선 남자의 대화를 무시하는 장면이다. 짧은 구간이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의미가 담긴다. 맹지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가 어떤 생활을 해 왔는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지내왔는지와 관련한 문제다. 다함(임투철 분)이라는 오래된 남자친구와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온(만나고 헤어지고를 끊임없이 반복하기는 하지만) 맹지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 또한 암시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만남에는 일반적으로 친구를 만드는 일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누군가를 쉽게 마주할 수 없었던 시절의 인연, 서로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여 있던 이들의 만남. 마냥 동등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애초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먼저 지켜보다가 이루어진 관계와 같은 감춰진 문장들이 두 사람의 명랑한 첫 만남 이면에 놓인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보통의 관계들이 모두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며 공동의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충돌하고 부딪힌다. 다른 만남을 쉽게 도모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두 사람 사이는 조금 더 그렇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