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알로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02.
"나 생각해 봤는데 스무 살 넘어서 혼자 여행한 적 한 번도 없더라. 이번에 혼자 가볼라고."
류정석 감독이 극 중 두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각각의 인물에게 하나씩의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놓는 방식이다. 각자의 자리에 하나씩, 그리고 서로의 자리에 또 하나씩. 딸의 개인 서사에 해당하는 것(A')은 배우의 꿈과 보험설계사로서의 현재와 같은 부분이다. 여기에는 부지점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시간여행자 남궁원과의 에피소드 역시 포함된다. 사업운도 없고 관운도 없어 천상 배우의 사주를 타고났다며,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계속 배우를 꿈꿔야 한다는 말. 반대로 엄마의 자리에 놓인 은우의 서사(A'')는 제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함께 보낼 내일의 현실이 놓인다.
한편 엄마 말숙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한다. 말숙의 개인 서사(B')는 30년 전의 소포로부터 시작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 시절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 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여러 고난과 아픔의 시간마저 용서된다.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그 시절의 감정과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다. 비록 또렷하고 선명하게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한편 딸의 자리에 놓인 서사(B'') 속 말숙은 단순히 치매에 걸린 엄마에 불과하다. 기억을 잃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로 딸에게 기댄 가련한 인생이다. 내일의 계획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딸의 의지에 가깝다. 치매 보험을 들어 보험비를 받자는 제안도, 그 돈으로 제주로 내려가 카페를 하자는 것도 모두 다 은우의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에 자신의 꿈은 하나도 없다.
03.
네 가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관계가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서사(A') 가운데 일부(배우의 꿈)를 포기한 은우와 개인의 서사(B')를 잊고 지내던 말숙이 함께였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두 서사 사이에서 조금 더 희생된다고 여겨지는 것은 은우다. 딸이라는 자리의 문제는 아니다. 엄마 말숙의 경우에는 치매로 인해 기억을 잃고 있었고 자신의 서사(B')가 이어지는 일상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탓이 더 크다. 갑자기 전해진 소포가 감춰져 있던 엄마의 서사(B'')를 건드리고, 이는 은우의 서사(A'')와 부딪힌다.
안정적인 줄 알았던 은우의 서사(A'')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엄마의 서사(B'')와 충돌하게 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동안 숨겨두었던 은우의 서사(A')다. 일종의 반동이다. 엄마의 솔직하고 투명한 고백 앞에서 은우는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을 강하게 터뜨리고 만다. 자신의 생일도 까먹고, 현관문 비밀번호도 곧잘 잊어버리는 엄마를 위해 자신이 내려놓아야 했던 꿈과 두 사람을 배신하고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 같은 것들이 뒤섞였다.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자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신 개인의 꿈에 이어 함께 설계하고자 했던 내일의 꿈마저 포기해야 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짧은 리와인드 신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보험 심사를 받는 엄마의 모습과 그 오래된 기억이 한 장면에서 오버랩된다. 딸의 자리에 놓인 서사(B'') 위로 새겨지는 엄마 자신의 서사(B')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내게 소중한 존재의 뜻과 의중을 따르고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에게 생긴 솔직한 목소리 또한 외면하기는 어렵다. 허락된 생의 길이가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내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병이 찾아오고 난 뒤에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