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극단 측에서 만든 포스터.
포스터극단 측에서 만든 포스터.극단 코너 스톤
 
여행자극장은 우리 집에서 몇 분만 걸으면 바로 닿는 극장인데 어제 동네 친구인 오세혁 작가가 "이 연극 안 보셨으면 얼른 보세요"라고 권하는 바람에 아내가 전화를 해봤더니 현매가 가능하다고 해서 환호작약하며 극장으로 향했다. 좋은 작가와 연출가 등 연극인들이 추천한 극을 놓치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상연 시간 다 돼서 현매로 사면 티켓값도 저렴한 편이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난 극단 코너 스톤의 작품을 본 적이 없는데 아내에게서 <맹진사 댁 경사>를 각색한 <맹>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연극이 시작되면 안갯속에서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노래를 하는 배우 다섯 명이 보인다. 뭔가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배우들이 정지 화면처럼 서 있으니 타르코프스키의 롱테이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나마 강일 배우나 한철훈 배우가 중심에 서서 진지하게 한 마디 하면 나머지 배우는 그림처럼 굳어서 그냥 서 있다. 특히 윤슬기 배우는 옆모습으로 서서 꼼짝도 안 하고 한참을 서서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이런 균형이 깨지는 것은 건넛마을 상여 나가는 걸 가지고 뭐라 의미 없는 소리를 주고받던 배우들이 갑자기 심심하니 윷놀이나 한 판 하자고 할 때부터다. 윷을 놀려면 윷가락 네 개가 있어야 하고 멍석이나 윷판도 있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동작으로만 해결한다. 두 사람이 쩔쩔매며 멍석을 들고 와 까는 모습에 이어 윷판을 분필로 바닥에 그린다. "의이차!" 하고 윷을 던지는 모습이 이어지는데 이게 모두 실체는 없고 시늉만 하지만 관객들은 다 진짜처럼 반응한다. 연극이니까, 연극에서만 가능한 장면이다. 영화를 이렇게 만들면 유치해서 못 본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고속촬영 같은 표정이나 동작도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하며 웃기고 울릴 수 있다. 그런데 석구의 아내가 나와서 자식을 잃은 사연을 털어놓는 장면 빼고는 거의 다 윷놀이 장면인데 이게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커튼콜 연극이 끝나고 찍은 커튼콜 사진.
커튼콜연극이 끝나고 찍은 커튼콜 사진. 편성준
 
웃음의 비결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윷판의 승부와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충청도 말씨, 그리고 과장된 표정연기에 있다. 김봉달 역의 한철훈 배우와 박석구 역의 강일 배우가 나이 든 팀이라면 엄진태 역의 이강민 배우와 송기대 역의 윤슬기 배우는 젊은 팀이다. 그 사이에 장말두 역의 정홍구 배우가 가운데 서서 심판을 본다. 이들은 윷놀이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윷을 던진 뒤 도개걸윷모의 결과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손바닥을 펼치거나 뒤집는 것으로 재현한다. 그런데 그 모든 장면이 느리고 진지하고 집요해서 연방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윤슬기 배우는 여성인데도 어쩐 일인지 남성 역을 맡았는데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연기를 너무 잘하기 때문이고 대사도 진짜 웃긴다. 예를 들어 윷말 두 개를 한꺼번에 업어 가자고 진태를 설득할 때도 할 때 "인생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여!" 같은 현대적 대사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처음엔 진지한 분위기로 임하던 관객들도 마당극처럼 변한 뒷부분에서는 마음 놓고 웃다가 일어섰다. 의외로 재미있는 연극을 한 편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윤조병 작가의 희곡을 원작으로 삼았다는데 윷놀이라는 게임의 상징성을 잘 살린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깔끔한 뒷맛을 남겼다. 연극을 다 보고 나오다가 객석에서 페친이라고 인사를 하시는 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아는 사이인데 실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냥 길에서 만났다면 '뭐 페친이라고 인사를 다 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연극 공연장이라는 공통분모가 단박에 친근감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낸 신간 북토크 때 오실 거라고 하시길래 그때 뵙자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유쾌한 연극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는 2024년 6월 2일까지 여행자 극장에서 상연한다. 며칠 안 남았는데 좋았다는 리뷰들이 지금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인터파크에서 예매해도 되고 극장 현매도 가능하니 한 번 노려 보시라. 

● 윤조병 원작 <윷놀이>
● 이철희 각색 연출
● 강일 곽성은 한철훈 이강민 윤슬기 정홍구 출연 
● 이경구 안무 움직임 
● 장서윤 작창 
● 이승호 음악
● 남경식 무대디자인
● 코너 스톤 작품 @cornerstone_presents
덧붙이는 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한 글을 조금 수정해서 오마이뉴스에 보냄,
연극리뷰 셰익첵 편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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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출신 작가.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읽는 기쁨』 등 네 권의 책을 냈고 성북동과 보령을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유머와 위트 있는 글을 지향하며 출판기획자인 아내 윤혜자, 말 많은 고양이 순자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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