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비건 식탁>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비건의 삶이 현애씨에게 채식주의로만 귀결되지는 않는다. 당장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포장 용기나 종이 상자 같은 경우에도 직접 하나씩 애정을 담아 만들어내는 간결한 삶으로도 표현된다. 그녀 역시 과거에는 큰 공간에서 대량으로 무엇이든 갖춰서 하는 일들이 좋았는데 이제는 스스로도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변하고 그 속의 자신 또한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것 같다.
사실 그녀가 제주에까지 내려오게 된 배경에는 몇 년 전 겪었던 잊지 못할 사건 하나가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과정에서 세입자가 을(乙)질을 했다며 오해받고 손가락질 당하며 공중파 시사 프로그램에도 수없이 취재되었던 사건, 그 중심에 현애씨가 있었다. 완전히 뒤바뀐 환경 속에서 이제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때 겪은 일들로 인해 당시의 감정이나 표정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여전히 어려운 마음이 된다. 어쩌면 비건의 삶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받아들인 자연스러운 변화인지도 모른다.
04.
"이 세계는 마이너 할 수도 있지만 안전하고 편안하고 서로 해 끼치지 않고 존중하려는 마음이 있는 세계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이제 그녀의 걸음은 자신만을 향해 있지 않다. 제주에서 생산된 재료를 갖고 비건버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이후부터다. 지역의 농업이 지속되려면 최소한 제주도에서 생산된 재료가 섬 안에서 모두 소비되어야 한다는 로컬 푸드 마켓의 지향점과도 상통한다. 다품종 소량생산이 되더라도 육지의 힘을 빌리는 일 없이 자체적으로 건강한 생산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타이거넛츠를 만나게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이제는 버터를 만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주의 다양한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다른 농산물과의 만남을 계획하고 있기도 하다. 900 고지에서 자라는 초기 생산 버섯, 한림의 노지에서 키우는 허브, 애월의 만차랑 단호박 등등을 모두 모아 8가지 비건 메뉴로 구성된 다이닝을 선보이기 위함이다. 채식이라는 목적지향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어떤 방식으로 조금 더 풍성하게 이 생활을 함께 나누고 즐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의 그림이다. 그녀의 삶이 그랬듯이, 식탁 위의 풍경이 자연스레 삶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