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세자가 사라졌다>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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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조선시대 세자들이 겪은 시련은 필설로 다하기 힘들다. 일례로, 초대 세자 이방석은 세자 된 지 6년 만인 1398년에 이복형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자리를 잃고 목숨까지 잃었다.
연산군 다음 왕인 중종의 장남은 인종이다. 인종은 생후 6일 만에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를 잃고 어머니의 7촌 조카뻘인 문정왕후 윤씨를 어머니로 맞게 됐다.
문정왕후와 후궁 박경빈(경빈 박씨)의 눈총을 받으며 성장한 인종은 12회 생일인 1527년 3월 26일(음력 2.25) 끔찍한 일을 겪었다. 침실 창문 밖 나무에 사지가 찢기고 불태워진 쥐가 매달려 있었다. 엄마 없는 어린 세자를 저주하는,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생일 선물이었다.
인종이 28세 때인 1543년 2월 10일(음 1.7)에는 그의 거처인 동궁전에서 대형 화제가 발생했다. 음력 1월 7일자 <중종실록>은 "불 기운이 매우 왕성했다"고 기술한다.
그런데도 인종은 적극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다. 영의정 윤은보 등이 주상 비서실인 승정원에 세자의 소재를 묻자 "창졸간이라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라는 무책임한 답변이 나왔다. 세자궁에 큰불이 났는데도 정작 세자가 최우선적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 뒤 문정왕후를 배후로 지목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세자 신분으로 임진왜란을 이끈 광해군의 시련은 너무도 많이 알려져 있다. 후궁 소생인 그가 31세 때 태어난 적장자 영창대군에게 자리를 빼앗길 뻔했던 일은 그의 처지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는 바람에 세자가 아닌 세손으로 불린 정조는 이방석만큼은 덜하고 인종·광해군보다는 더한 위협에 시달렸다. 1776년 4월 27일(음 3.10)에 영조를 뒤이어 제22대 주상이 된 정조는 즉위 3개월이 조금 지난 8월 6일(음 6.23)에 세손 시절을 회고하는 말을 남겼다.
음력 6월 23일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스물네 살 된 정조는 자신이 세손 시절에 외출복도 벗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드는 일이 많았다며 그런 상태가 수개월간 이어진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잠자다가 자객의 공격을 받을까봐 외출복을 입은 채로 이불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방석·인종·광해군·정조 등과 달리, 위 드라마 제목처럼 궁궐에서 사라지는 방법으로 시련을 겪은 세자도 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이 여기에 해당한다. 황태자가 된 뒤에 그는 궁은 물론이고 조선 땅 자체에서 사라져야 했다. <세자가 사라졌다>라는 드라마 제목에 부합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순종황제는 고종의 장남이고 이은은 고종의 7남이다. 이은은 형들이 많이 죽은 상태에서 대한제국 선포(1897.10.12) 8일 뒤에 태어났다. 그래서 출생 당시에는 그가 셋째아들이었다. 왕국이 아닌 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대군이나 군(君) 대신 친왕(親王)으로 책봉된 그는 1907년에 순종의 후계자로 정해졌다. 순종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종과 이은 사이에 의친왕 이강이 있었다. 그런데도 영친왕이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가 된 이유가 있다. 순종과 의친왕은 3년 차이이고, 순종과 영친왕은 23년 차이였다. 그래서 자식뻘인 영친왕이 큰형의 후계자가 되는 게 자연스러웠다. 거기다가 의친왕의 어머니인 후궁 이귀인(귀인 이씨)보다 영친왕의 어머니인 후궁 엄귀인(귀인 엄씨)이 더 강력했던 점도 함께 작용한 결과다.
순종이 황제가 되는 과정은 대한제국의 불행을 그대로 반영했다. 아버지 고종은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했다가 일본과 친일파의 미움을 사서 강제 퇴위를 당했다.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순종이 제위에 오르고 영친왕이 황태자가 됐기 때문에 순종과 영친왕의 승진은 기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황태자가 된 지 얼마 안 돼 영친왕은 대궐에서, 조선에서 사라졌다. 일본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던 것이다. 그가 황태자가 된 것은 고종이 퇴위조서를 발표(1907.7.18)한 지 20일 뒤인 8월 7일이다. 끌려간 것은 4개월이 조금 안 되는 12월 5일이다. <세자가 사라졌다>의 세자는 금방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 사라졌지만, 이은은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때 이은은 만 10세였다. 대한제국이 일본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본이 그를 인질로 데려갔다. 명목은 일본 유학이지만 실질은 인질 압송이었다.
인질로 끌려가는 어린 아들에게 55세 된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해준 말이 있다. 대한제국 황실 전문가인 김을한 기자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에 따르면, 영친왕을 "아기야"라고 부르는 고종은 "일본에 가거든 아무리 곤란한 일이 있더라도 모든 것을 꾹 참고 때가 오기를 기다려라"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글자 하나를 써줬다. 참을 인(忍) 한 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