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조선 후기가 배경인 MBN 사극 <세자가 사라졌다>에 나오는 최명윤(홍예지 분)은 싸움도 잘하고 말도 잘 탄다. 깡패 여럿 상대하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다. 거기다가 의술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신다. 성격도 쾌활하고 가치관도 개방적이다. 이렇게 이것저것 다 괜찮은 사람은 조선 후기는 몰론이고 지금도 매우 드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명윤처럼 이것저것 다 잘하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무예나 승마에서만큼은 밀리지 않았을 여성들이 옛날에 많았다. 옛날 여성들의 무예나 승마 실력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적지 않다.
 
한국 여성들이 말에 올라탄 장면이 고려 건국 205년 뒤인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단의 눈에도 띄었다. 이 사신단의 일원인 서긍은 고려 방문 보고서인 <고려도경>에서 검은 비단을 너울로 쓴 여성들이 노복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다니는 장면을 묘사했다.
 
서긍은 "말을 부리며 따라다니는 이는 세 명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서긍이 목격한 것은 노비가 고삐를 잡아주는 상태에서 여성이 말을 타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말을 타는 모든 여성이 이런 식의 보조를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광해군의 젊은 새엄마인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기록된 <계축일기>에는 투구를 쓴 궁녀 두세 명이 말에 올라탄 모습이 나온다. 광해군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 보내려고 이 궁녀들을 보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군을 강화로 옮긴다니 참 불쌍하더라"라고 수군대는 광경이 <계축일기>에서 묘사된다.
 
조선 후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1629~1689)이 함경도 길주에서 지은 시에는 말을 탄 기생들이 등장한다. 시인과 시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한 임방(1640~1724)의 <수촌만록>에서 그 시를 확인할 수 있다.
 
김수항은 함경도 풍경을 묘사한 이 작품에서 "기후가 항시 추워 초목이 자라지 못하고"라고 한 뒤 "군복 입은 기생의 무리가 말을 잘 달리고"라고 묘사했다. 군복을 입었는데도 기생으로 보였다면 검무를 하는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단이 평안도 의주에 도착하면 의주부윤이 주연을 베풀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기녀들의 마상무예 공연이 열리곤 했다. 말을 잘 탔다는 것으로 보아, 김수항의 시에 나오는 기생들도 마상무예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뛰어난 무예술로 임금을 도운 부낭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최명윤은 승마술과 무예를 이용해 세자 이건(수호 분)을 돕는다. 독립운동가이자 한국학 학자인 안확(1886~1946)의 <조선무사영웅전>에 나오는 부낭은 무예 실력을 바탕으로 세자가 아니라 임금을 도왔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그의 조력에 힘입어 정권을 지켰다.
 
지금의 자강도인 평안도 자성(慈城) 출신인 부낭은 승마와 활쏘기에 능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나온 군대 소집영장을 가로챈 뒤 남장 차림으로 말을 타고 평안도 군영에 들어갔다. 그 직후, 그는 이 부대가 반란군이 되려 한다는 징후를 포착한다. 광해군 실각 이듬해인 1624년에 인조 정권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이괄의 군대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괄은 남장 차림의 부낭이 무예가 뛰어난 것을 확인하고 100명 정도를 지휘하는 초장(哨長)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상한 낌새를 확인한 부낭은 밤중에 말을 타고 탈영해 평안도 안주목사 정충신에게 이괄을 고발한 뒤 구체적인 진압 방책을 건의했다. 이괄이 필시 한양으로 진격할 것이니 그를 치려면 한양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건의였다.
 
이 책략을 따른 결과로 정충신이 이괄 부대를 격파하고 일등공신이 됐다는 게 안확의 설명이다. 난이 진압된 뒤 정충신이 부낭을 중용하려 하자 그제서야 부낭은 자신이 여자임 고백한 뒤 군영을 떠났다고 한다.
 
여성이 무예를 하거나 말을 타는 모습이 아주 드물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조선시대 소설에도 등장한다. <장화홍련전>에도 장화가 통곡하며 말을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 후기 학자이자 문인인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의 <삽교만록>에 담긴 소설도 무예하는 여성을 등장시킨다. 안석경은 <삽교만록> 속의 이 소설에 제목을 달지 않았다. 그래서 한문학자 임형택·이우성 두 교수가 1978년에 <이조 한문단편집> 중권을 펴낼 때 편의상 '검녀'라는 제목을 붙였다.
 
<검녀>의 주인공은 본래 노비였다. 그는 주인집이 권세가의 공격을 받아 멸문지화를 당하자, 주인집 아가씨와 함께 도주해 목숨을 부지했다. 그런 뒤 남장을 하고 다니며, 복수를 도와줄 검객을 물색했다. 이때 그와 아가씨는 10대였다.
 
2년 만에 검객을 만난 그는 그 밑에서 5년간 무공을 익힌다. 그렇게 해서 검녀가 된 뒤 도회지를 다니며 검술 시범을 해서 돈을 벌어들인다. 그렇게 다니다가 원수의 집에서 공연을 할 기회를 얻게 되고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가슴의 한을 푼 아가씨는 여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검녀에게 유언을 남긴다. 평범한 남자를 만나 순종하며 살지 말고 뛰어난 남자를 만나라는 유언을 남긴 뒤, 검을 입에 문 채 세상을 떠난다.
 
검녀는 그 유언에 따라 소응천이라는 저명한 학자를 찾아가 첩이 되겠다고 자청한다. 그러고 나서 몇 년 뒤 술과 안주를 차려놓고 소응천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검녀는 '알고 보니 당신은 작은 재주는 많지만 세상을 이끌 큰 경륜은 없다'며 따끔한 충고를 해준 뒤 소응천 곁을 떠난다.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소설 속의 소응천은 실존 인물이다. 2021년 <고소설 연구> 제51집에 실린 윤재민 고려대 교수의 논문 '안석경의 <검녀> 다시 읽기'는 "<검녀>의 남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응천(1704~1760)은 실존 인물로서 일찍부터 소론계 인사들과 교유한 소론계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보수세력인 서인당의 분파인 소론당은 또 다른 분파인 노론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다. 소응천은 소론계 지도자인 윤증의 제자였다. 시문과 경전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 소응천이 소설 <검녀>에서 '의문의 1패' 비슷한 것을 당했던 것이다. <검녀>를 쓴 안석경은 경쟁세력인 노론당의 일원이었다.
 
위의 사례들에서 확인되듯이 말을 타거나 무예를 익히는 여성들의 모습은 옛날 문헌들에서 곧잘 발견된다. 지금은 물론이고 옛날에도 무예와 승마가 남성의 전유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여성 무사 세자가사라졌다 계축일기 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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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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