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퀀텀 오브 솔러스 포스터

▲ 007 퀀텀 오브 솔러스 포스터 ⓒ 소니픽처스

 
첩보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많은 답이 나올 수 있겠으나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것 하나가 무너지지 않는 긴장감일 것이다. 즉 서스펜스다.
 
첩보영화가 무엇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을 다루는 영화다. 그것도 긴박하게. 명목상이나마 법과 질서가 바로 선 세상이 우리가 아는 것이라면, 첩보물이 다루는 세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곳이다. 무고한 사람을 죽여도 책임을 물리지 않는 요원들이 날뛰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기며 독극물, 각종 기술들을 다뤄진다. 제가 속한 나라며 기관, 기업의 이익을 위해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맞붙는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만큼 흥미와 흥분을 자아낸다.
 
알지 못한다는 건 한편으로 알려져선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임무를 비밀로 하여야 하고 알려질 경우에는 누구도 그 뒤를 봐주지 않는단 건 첩보물 속 요원들의 숙지사항이기도 하다.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을 안고 오로지 혼자 온갖 위험과 맞서는 요원의 일상은 그 자체로 긴장감의 연속이다. 첩보영화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 또한 바로 그 긴장이다.
 
긴장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영화는 관객이 편히 앉아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 든다. 관객이 사고하는 속도보다 조금 더 빠르게 장면과 장면을, 사건과 사건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 와중에 관객이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느끼도록 충분한 자극을 주는 것 또한 영화가 해내야 할 몫이다. 관객이란 한 번 본 것은 익숙하게 느끼게 마련, 낯설고 불편하게 몰아세우기 위하여 비틀고 몰아치는 연출이 계속되고는 한다.
 
그런 의미에서보자면 첩보영화란 연출자와 관객의 대결이라 할 만하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스틸컷

▲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스틸컷 ⓒ 소니픽처스

 
새 시대 <007>의 스타일을 완성하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한 두 번째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관객과의 대결에서 좀처럼 선을 내어주지 않으려 든다. 추격과 추격, 격투와 격투가 거듭되는 가운데 그 맺고 끊음이 관객의 속도보다 꼭 반 틈 빠르게 나아간다. 너무 빨라 관객이 뒤떨어지게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느려 관객이 지루해해서도 안 되니, 그 미묘한 속도를 유지하는 게 영화의 생명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전작 <카지노 로얄>이 다니엘 크레이그를 제임스 본드로 발탁해 시리즈를 새로이 썼다면, <퀀텀 오브 솔러스>는 전작이 미처 해내지 못한 과제를 완수하는 작품이다. 무려 20여 편이 나온 시리즈 가운데서도 두 작품은 서로 드물 만큼 긴밀히 엮여 있는데, 본드가 전작에서 죽은 저의 첫사랑 베스퍼(에바 그린 분)를 잊지 못하여 그리워하고 그 자장 아래 새로운 성격을 내보이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그렇다. 또 임무 중 전작에서 등장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전작에서 풀지 못한 연을 해소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두 작품은 짝을 이뤄 시리즈 가운데 제가 맡은 역할을 수행한다. <카지노 로얄>이 기존의 제임스 본드와 어울리지 않는 다니엘 크레이그를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납득케 했다면, <퀀텀 오브 솔러스>의 임무는 기존 시리즈와 전혀 다른 연출과 촬영, 편집으로 시리즈의 색을 새로 입히는 것이다. 우아하고 신출귀몰한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 막무가내로 부딪치고 구르면서 나아가는 제임스 본드로 말이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스틸컷

▲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스틸컷 ⓒ 소니픽처스

 
전과 다른 캐릭터, 전과 다른 스타일
 
영화의 시작부터 본드는 남다른 모습을 보인다. 전작에서 애인을 잃은 본드는 임무 중 마주하는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여 나간다. 심지어는 죽여서는 안 되는 이들까지도. 죽은 이들 중에는 같은 영국 공직자까지 있을 정도지만 그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오죽하면 언제나 호의적으로 뒤를 봐주는 상급자 M(주디 덴치 분)이 '사람을 그만 죽이라'고 닦달할 정도지만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이미 살인면허까지 획득한 정보기관 최고요원은 해직하는 것 말고는 멈춰세울 방법이 마땅치 않다.
 
본드가 향하는 건 명백하다. 제 애인 베스퍼를 죽인 이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조직이 연관돼 있음을 안 본드는 그들을 추적하여 책임 있는 범인을 색출하겠다 결심한다. 이미 MI6 내부에까지 적이 침투해 있는 상황, 본드는 누구도 믿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작전에 돌입한다.
 
이야기는 개인적인 사유로 적을 추적하던 그가 영국은 물론 세계 질서에 위협이 되는 조직에 타격을 입히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미개발국의 토지를 사들여 친환경적으로 개발하는 사업체를 이끄는 사업가 그린(마티유 아말릭 분)이 본드의 첫 타깃이 된다. 그는 겉으론 선한 의지를 지닌 사업가 행세를 하지만 실제로는 테러조직의 배후인물이다. 그린은 아이티의 독재자였으나 권력싸움에 밀려 축출돼 있는 메드라노 장군을 지원해 다시 정권을 잡게 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그 배후엔 장기적으로 아이티의 국익을 챙기겠다는 내심의 의도가 자리한다. 본드는 그린을 매개로 은막에 가려진 비밀조직에 접근하려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전과 다른 스타일의 시리즈를 시장에 안착시키는 게 목적인 작품이니만큼 그 줄거리는 기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가진 스타일이다. 많은 이들이 <퀀텀 오브 솔러스>를 기존 <007> 시리즈와는 다른 성격을 보인 작품으로 평가하는데, 그건 이 영화가 배우들의 기용과 연기, 연출, 편집 등에서 <007>보다는 이 시대 액션 오락영화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략은 꽤나 유효하여 낡은 시리즈라 여겨졌던 <007>이 완전히 재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스틸컷

▲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스틸컷 ⓒ 소니픽처스

 
끊이지 않는 긴장, 성과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영화는 그 시작부터 <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추격신이 등장한다. 파쿠르를 떠올리게 하는 치열한 추격전과 맨 땅에 구르고 벽을 부수는 맨몸액션이 이어지는데, 그 박진감이 당대 최고의 액션영화들과 비교해도 얼마 떨어지지 않다. 사람 대 사람 다음은 자동차 추격신이다. 첩보영화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자동차 추격신에서도 <007>은 남다름을 보인다. 오랫동안 낡은 액션으로 가득한 시리즈란 평가를 받아온 게 무색할 만큼 세련된 연출과 편집이 돋보인다.
 
영화는 그 긴장이 끊어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 대 사람이 끝나면 자동차 대 자동차가, 칼을 사용한 액션 뒤엔 총을 활용한 액션이, 그리고 다시 비행기 추격전까지 등장하는 것이다. 조금씩 규모를 키운 액션을 이어붙이면서도 그 연속이 억지스럽다거나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세심하게 매만진 흔적이 역력하다. <카지노 로얄>로 캐릭터를 바로 세우고 <퀀텀 오브 솔러스>로 스타일을 확인한 <007>은 비로소 21세기에도 제 시대가 이어질 것임을 선포한다.

한국에서도 시리즈 가운데 최고 흥행성적을 올린 <퀀텀 오브 솔러스>는 경제위기로 침체에 빠진 할리우드에서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제작비에 비해 다소 아쉬운 성적을 거뒀음에도 감독인 마크 포스터는 이후 <월드워Z>, <오토라는 남자> 등의 연출자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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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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