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어린이 영화 <키드캅> 이후 10년 동안 제작 및 수입에 전념하던 이준익 감독은 2003년 박중훈-정진영 주연의 <황산벌>을 통해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그리고 2005년 <왕의 남자>로 123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한국영화 세 번째 천만 감독에 등극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 이후 단 9개월 만에 선보인 <라디오스타>마저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으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2008년에 선보인 <님은 먼 곳에>와 2010년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이에 이준익 감독은 2011년 신작 <평양성>을 선보이면서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평양성>이 손익분기점(250만)에 도달하지 못하면 상업영화 감독으로 은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평양성>은 전국 171만 관객에 그쳤고 이준익 감독은 약속대로 상업영화 감독에서 은퇴했다.

그렇게 관객들은 아까운 감독 한 명을 잃었다며 아쉬워했는데 그로부터 약 2년 6개월이 지난 2013년 10월 이준익 감독은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이준익 감독은 이 이야기를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이른 복귀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준익 감독을 두고 한 차례 은퇴를 선언했던 감독의 상업적 욕심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은 바로 아동 성범죄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 <소원>이었다.
 
 <소원>은 200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동 성범죄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소원>은 200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동 성범죄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 롯데쇼핑(주)롯데엔터테인먼트

   
20년 넘게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배우

배우들 중에는 젊은 시절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가 꾸준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대중들에게 빨리 잊히며 '추억의 스타'가 되는 인물이 적지 않다. 반면에 당대 최고의 스타로 한 시대를 호령하진 못하더라도 꾸준한 활동으로 대중들에게 서서히 각인되는 배우들도 있다. 1998년 시트콤의 단역으로 데뷔해 조·단역부터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아 지금은 대중들에게 믿음을 주는 배우로 성장한 엄지원은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배우다.

2003년 정우성 주연의 <똥개>로 청룡영화상 신인상 후보에 오르며 주목 받은 엄지원은 2005년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한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에 출연했다. 2006년에는 김대승 감독이 연출하고 유지태, 김지수가 출연한 <가을로>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생존자 세진을 연기하며 춘사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데뷔 후 처음으로 엄지원의 연기가 대중과 평단에 인정 받는 순간이었다.

엄지원은 2008년 고교야구 스타 선동열의 스카우트 경쟁과 광주민주화 운동을 결합한 김현석 감독의 <스카우트>에서 대학시절 연인 임창정과 광주에서 재회하는 시민운동가 세영을 연기했다. <스카우트>에서 임창정과 좋은 연기호흡을 보였던 엄지원은 2010년 영화 <불량남녀>에서 임창정과 또 한 번 연기호흡을 맞췄다(특히 <불량남녀>에서 나온 임창정의 대사 "xx 카리스마 있어"는 오늘날까지도 짧은 인터넷 영상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2010년대에도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던 엄지원은 2013년 이준익 감독의 <소원>에서 동훈(설경구 분)의 아내이자 소원의 엄마 미희를 연기했다. 겉으로는 까칠하지만 속은 여리고 약한 소원의 엄마를 섬세하게 연기한 엄지원은 <소원>을 통해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엄지원은 2017년에도 <미씽: 사라진 여자>로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연기상을 수상하며 데뷔 후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2020년 연상호 감독이 각본을 쓴 드라마 <방법>에서 사회부기자를 연기한 엄지원은 2021년 <방법>의 스핀오프에 해당하는 영화 <방법: 재차의>에서 퇴사 후 온라인 독립뉴스채널을 운영하는 탐사기자 역으로 출연했다. 그리고 2022년에는 정서경 작가가 각본을 쓰고 김고은, 박지현, 박지후가 세 자매로 출연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메인빌런 원상아를 연기하면서 악역으로 파격적인 연기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런닝타임 곳곳에 '눈물벨' 숨어있는 영화
 
 <소원>은 2011년 상업영화 감독 은퇴를 선언했던 이준익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복귀작이었다.

<소원>은 2011년 상업영화 감독 은퇴를 선언했던 이준익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복귀작이었다. ⓒ 롯데쇼핑(주)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소원>은 2010년에 출간된 소재원 작가의 소설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소원>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영화개봉 후 재출간된 책은 <소원-희망의 날개를 찾아서>로 원제와 부제가 변경됐다).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 <소원>이 지난 2008년에 있었던 끔찍한 아동 성범죄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도 가해자는 알코올중독에 의한 심신미약으로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고 지난 2020년 12월 만기 출소했다.

만약 <소원>의 설정으로 <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 감독이나 <악마를 보았다>의 김지운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면 가해자는 최소 사지가 찢기거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당하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소원>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복수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피해자와 가족들이 고통을 회복하는 과정과 다시 평범했던 삶을 찾아갈 수 있느냐에 주목한 작품이다.

<소원>은 개천절과 한글날이 포함된 2013년 10월에 개봉해 <깡철이>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그래비티> 등과 경쟁했다. 실제로 <소원>이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1위에 오른 날은 단 5일 뿐이었지만 개봉 4주차가 될 때까지 꾸준한 관객몰이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271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소원>을 통해 '기사회생'한 이준익 감독은 이후 <사도>와 <동주> <박열> <자산어보> 등을 연출하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소원>에서 마음을 닫아버린 소원(이레 분)이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되는 대상은 엄마도, 아빠도, 상담선생님도 아닌 '냉장고나라 코코몽'이었다. 영화 속에서 소원은 코코몽을 친구로 여기는데 이를 알게 된 아빠 동훈은 코코몽 인형을 쓰고 연기를 하면서 소원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영화 후반 코코몽이 아빠라는 사실을 소원에게 들키게 되는데 소원이 코코몽의 탈을 벗기고 아빠의 땀을 닦아주는 장면은 영화의 '눈물벨' 중 하나였다.

사실 <박하사탕>의 김영호와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 <실미도>의 강인찬, <역도산>의 역도산 등 그동안 설경구가 맡았던 강렬한 캐릭터들을 떠올리면 <소원>의 평범한 가장 동훈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설경구는 <소원>에서 쌓인 분노와 감정을 최대한 폭발시키던 이전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절제된 연기를 통해 큰 사고를 당한 딸을 둔 아버지 역할을 멋지게 소화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2년 조기 입학한 연기신동
 
 <소원>에서 쉽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했던 이레는 이후 신세경,김소현,최강희,박은빈 등의 아역을 맡았다.

<소원>에서 쉽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했던 이레는 이후 신세경,김소현,최강희,박은빈 등의 아역을 맡았다. ⓒ 롯데쇼핑(주)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무거운 주제와 별개로 영화 <소원>의 최대수확은 이레라는 걸출한 아역배우를 발굴했다는 점이다. 어린이 모델로 활동하던 2012년 드라마 <굿바이 마눌>로 연기를 시작한 이레는 이준익 감독에게 발탁돼 <소원>에서 임소원 역을 맡았다. 비가 오는 날 등교를 하다가 비극적인 일을 당하는 소원은 사건 이후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이며 공포에 떨게 되는데 이레는 이 어려운 캐릭터를 무리 없이 소화하며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소원> 이후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오빠생각> 등에 출연한 이레는 <육룡이 나르샤>에서 신세경의 아역을 맡았고 2017년에는 <마녀의 법정>으로 KBS 연기대상 청소년 연기상을 수상했다. 2020년 영화 <반도>에서 멋진 카체이싱을 통해 걸크러시 매력을 선보였던 이레는 지난 3일 종영한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에서 박은빈이 연기한 서목하의 아역을 맡아 몰입감 높은 연기와 함께 수준급 노래실력까지 뽐냈다.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주연을 도맡아 할 정도로 성장한 배우 라미란은 2013년 <소원>에서 소원의 절친 영석의 엄마이자 소원 엄마 미희의 절친을 연기했다. 큰 충격을 받은 미희에게 면회를 갔다가 얼굴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던 영석 엄마는 미희가 식사도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도시락을 싸 들고 찾아가 씩씩하게 미희를 위로했다. 그리고 소원이 퇴원한 후에는 만삭이 된 미희 대신 소원의 등하교를 책임지기도 했다.

2010년 영화 <웨딩드레스>에서 어른이 된 김향기를 연기하며 데뷔한 양진성은 드라마 위주로 활동하다가 <소원>에서 이도경 순경 역을 맡았다. 때로는 경찰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고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경찰서로 동훈을 불러내는 등 실수도 적지 않았지만 소원이의 심리치료를 위해 미희를 설득하는 등 마음씨는 상당히 착하다. 이 순경은 소원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코코몽 공연 때 '아로미'의 인형을 입고 열심히 춤을 추기도 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소원 이준익감독 엄지원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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