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재판은 무엇일까.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냐로 귀결되기도 하는 이 질문에는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을 테다. 그럼에도 결코 빠지지 않는 선택지가 바로 이스라엘 법정의 아이히만 재판이 되겠다. 당대 재판의 전 과정이 생중계 됐을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호주와 남미 등 30여 개 나라에 촬영분을 보내어 편집 상영토록 했으니 그 관심이 얼마만큼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서 친위대 장교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를 받아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태인 학살 작업의 실무 총책을 맡았다. 600만 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태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의 주동자로 지목됐고 그 수법의 악랄함 가운데 상당부분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아이히만은 전후 미국의 포로가 되었으나 카톨릭 교회의 도움을 받아 아르헨티나로 도주했고, 10여 년 간을 무탈하게 생활한다.
 
그러나 그는 나치 잔당으로서의 정치적 행보를 멈추지 않았고, 그를 추적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타국에서 불법으로 납치 체포되기에 이른다. 특정 국가 첩보기관이 타국에서 요인을 납치하고 암살하는 일이 종종 행해지긴 하였으나, 아이히만의 사례에서처럼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해외에 중계하며 심판한 사례가 흔치 않다는 점에서 윤리적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이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리고, 그는 마침내 사형을 언도받아 1962년 교수대에서 사망하기에 이른다.
 
아이히만 쇼 포스터

▲ 아이히만 쇼 포스터 ⓒ (주)디스테이션

 
세기의 재판, 영화가 되다
 
흔히 아이히만은 사회학자 한나 아렌트의 <뉴요커> 취재 및 그를 바탕으로 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오늘의 대중과 만난다. 사실 이보다는 책의 요체라 해도 좋을 '악의 평범성'이라는 언급으로 대중에게 기억된다. 대단한 악마가 아닌,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개인 아이히만이 특정한 상황에 놓여 홀로코스트 같은 악행을 기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이 아렌트의 판단이었다. 아렌트는 사형선고에 공감하면서도 그가 우리 중 흔히 발견되는 평범한 존재이며, 당대 나치 독일의 법과 명령에 충직한 결과가 이 같은 범죄라고 주장한다.
 
영화 <아이히만 쇼>는 1961년 봄 예루살렘에서 이뤄진 아이히만 재판을 다룬다. 영화엔 정부의 허가를 얻어 재판을 촬영해 중계하려는 촬영팀이 등장한다. 제작자인 밀턴 프루트만(마틴 프리먼 분)과 PD 레오 허위츠(안소니 라파글리아 분)가 그 주역으로, 정부와 달리 촬영을 허가하지 않으려던 재판부를 설득하고 협박에도 굴하지 않으며 아이히만 재판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1961년에 있었던 미국의 쿠바 침공이며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 등 세계사적 사건 가운데 아이히만 재판에 대중의 관심을 붙든 역할을 이들이 수행해 낸다.
 
영화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 촬영과 방영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박하게 담긴다. 제작진 상당수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 수감된 적 있는 유태인들로 구성돼 있고, 재판에 나온 증인들의 처참한 증언들도 일부 담겨 그들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어떤 수준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촬영 중 충격적인 증언이 나오자 호흡을 하지 못하는 카메라맨의 모습이라거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깊이 하지 못하는 모습 등이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영화에선 프루트만과 허위츠가 수차례 논쟁을 벌이는 과정이 인상 깊게 등장한다. 프루트만은 이 사건을 높은 시청률 가운데 무탈하게 방송하고 것이 의미 있다 생각하는 반면, 허위츠는 아이히만에게서 그 내면에 깃든 악의 근원을 포착하는데 집중한다. 때문에 시청률이 더 나올 수 있는 장면들을 놓치게도 되고, 프루트만과 갈등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아이히만 쇼 스틸컷

▲ 아이히만 쇼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악의 평범성과 비범한 연기 사이
 
재판 내내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관료의 모습을 연기한다. 전술한 아렌트 또한 아이히만의 이 같은 모습에 속아 그가 그리 특별하지 않은 개인으로,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론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의미가 큰 이론이긴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것이 아이히만에게 통용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는 증거를 여럿 발견한다. 나치 독일에서는 물론, 패망한 뒤 아르헨티나에서까지 나치 친위대 활동을 이어가며 유태인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내던 그다. 법정에서 보인 평이한 관료로서의 태도를 전부로 착각하여 그를 평범한 개인으로 여긴 것이 단견이라 비판을 받을 밖에 없는 이유다.
 
허위츠가 포착하고자 한 것도 그것이다. 그는 아렌트와 달리 아이히만을 결코 재판에서 그가 드러낸 모습만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관료로서 충성한 결과일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입장을 넘어, 그가 그 같은 범행에 이른 진짜 이유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로부터 검찰의 신문과 증인의 증언 등이 있을 때마다 아이히만의 심적 변화를 포착하기 위한 집요한 클로즈업을 감행한다. 그러한 장면이 때로 증인과 검사의 중요한 움직임을 놓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허위츠는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악은 결코 평범하지 않고, 평범함을 위장할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는 실제 당시 다큐멘터리 촬영분을 상당부분 차용해 활용하는 한편, 허위츠와 프루트만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간다. 그로부터 그 유명세로 인하여 아이히만에 대한 유일한 진실로 여겨지게 된 아렌트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비판하며, 그 너머에서 악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심리학을 쌓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내보인다. 악의 이면엔 그저 그릇된 체계와 독재, 관료제적 구조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악행에는 악행을 하는 구성원의 적극적 찬동 또한 중대하게 작용함을, 무엇보다 악의 구조는 개인들의 찬동을 통해 강화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히만 쇼 스틸컷

▲ 아이히만 쇼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한 민족의 문제를 넘어 인간을 말하다
 
그럼에 지난 100년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재판이 바로 이스라엘의 아이히만 재판이라 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저 한 개인과 특정한 민족의 문제를 넘어 인류가 범할 수 있는 중차대한 악행과 그 악이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이 재판으로부터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악인을 막상 보니 평범하더라,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그와 같은 상황이 주어지면 그와 같은 악을 행할 수 있다, 관료제와 폭압적 구조가 그 재료일 뿐이다 같은 아렌트의 이론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느 진실을 집요하게 추적한 PD가 있었음을 이 영화는 알게 한다.
 
영화는 2023년 오늘의 세계사에도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때 나치 독일에게 인종말살의 위협을 겪은 유태인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아랍인들이 살던 땅에 찾아와 그를 밀어내고 세운 나라가 오늘날 팔레스타인을 탄압하고 공격하는 모습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한때 저들 민족에 대한 말살에 가까운 폭력을 규탄하던 이들이, 지금에 와서는 다른 어느 민족을 기본권조차 보장하지 않은 채 수용하고 공격하여 가자지구에서만 1만이 넘는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아이히만을 법정에 세운 그 시절 이스라엘인들은 오늘날 저들의 후예가 저지르는 폭력에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다시는 그와 같은 참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전 세계로 사건을 중계했던 이들이 오늘의 비극 앞에 어떤 말을 내놓을까. <아이히만 쇼>로부터 오늘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는 인류가 지난 시간 동안 악을 다루는 데 여전히 실패해왔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히만 쇼 스틸컷

▲ 아이히만 쇼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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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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