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출범은 독재로 점철된 한국현대사를 건너 마침내 권력이 국민 앞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어긋나면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람을 죽이고 가두었던 국가폭력의 시기가 종언을 고하고, 마침내 그 과오를 들추어 바로잡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랬던 진실화해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 김광동 위원장은 임명 전부터 "과거사위 활동은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한다"는 기고문으로 논란을 일으키더니, 급기야 진실화해위의 과거 성과조차 무색게 하는 발언과 행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10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과 만난 자리에서 '전시에 재판 없이 민간인을 죽일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보도되며 유족과 시민사회를 분노케 한 일은 현 정부의 역사인식이 얼마만큼 퇴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다.

2005년 참여정부에서 첫 출범한 진실화해위는 지난 수년간 한국사회에 여러 성과를 남겼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작업이다. 진실화해위 제1기가 출범한 이래 진행돼온 작업으로, 유족 등의 제보를 받아 그 유해를 발굴해 온 것이다.
 
 영화 < 206: 사라지지 않는 > 포스터

영화 < 206: 사라지지 않는 > 포스터 ⓒ 찬란

 
정부가 멈춰 서자 시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진실화해위는 어느 순간 멈춰 서고 만다. 반세기 동안 해묵은 작업이 산적한 상황에도, 이명박 정부가 새로 임명한 위원장이 활동 기간을 충분히 연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돈과 시간이 필요한 발굴작업 또한 모두 멈춰 서고 말았다. 유족들을 중심으로 분노가 들끓었으나 되살릴 방도는 없다.
 
유해를 발굴하고 추모시설을 세우고,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유가족 앞에 나서 사과해야 한다는 유족의 오랜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공을 무기처럼 휘두른 나라에서 근 반세기 동안이나 억눌려 지내야 했던 유족들의 목소리는 무참히 짓밟혔다. 유족들이 노쇠해지면서 이를 바로잡을 기회 또한 갈수록 희미해지는 듯했다.
 
그때 일어난 것이 시민들이다. 2014년 들어 시민이 주체가 된 공동조사단, 즉 시민발굴단이 결성됐다. 유해발굴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일념 말고는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던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삽과 붓을 들고 발굴작업에 나섰다.

이들의 목표는 하나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 그 억울한 죽음들을 추슬러 마땅한 절차를 밟게 하는 것이다. 죽음은 죽음으로, 장례를 통하여 제대로 된 죽음을 맞게 하는 일이다. 그로부터 죽음 뒤에 남은 해묵은 원을 달래고 역사 앞에서 이 죽음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다. 국가가 시민을 향해 저지른 범죄가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 마땅히 그 대가를 치르고 다시는 그 불행한 역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되새기는 일이 한국에서도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 206: 사라지지 않는 > 스틸컷

영화 < 206: 사라지지 않는 > 스틸컷 ⓒ 찬란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그 사실적 기록
 
< 206: 사라지지 않는 >은 이에 대한 기록이다. 시민들이 발굴현장에서 반세기 전에 묻힌 이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을 담았다. 허철녕 감독이 수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다섯 곳의 유해발굴지의 발굴과정과 수습한 유해에 담긴 사연, 또 발굴단 관계자며 발굴을 기다리는 유족들의 인터뷰로 96분의 러닝타임을 가득 채웠다.
 
영화는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담담하게 보여주기를 선택한다. 땡볕 아래 땅바닥을 파는 이들의 작업을 담고, 이 작업이 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의미를 드러낸다. 매장지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유해들이 어떤 외침보다 작업의 의미를 일깨운다. 누군지 확인할 길 없는 수많은 시신들이 총탄에 맞고 불에 타서 한데 파묻힌 채 길고 긴 시간을 건너왔다는 것이 참담할 지경이다.
 
충청남도 아산 배방읍 설화산 발굴지는 그중에서도 언급할 만하다. 시민발굴단의 다섯 번째 유해발굴지인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폐금광이 있던 자리다. 다른 많은 지역이 그러하듯, 아산 땅도 약 두 달여 동안 북한군에 의해 점령됐던 지역이다. 국군이 이 땅을 수복한 뒤 경찰 치안대가 나서 점령기 동안 북한에 동조한 부역혐의자 색출이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좌익분자로 지목된 수백 명이 폐금광으로 끌려가 살해됐다.
 
 영화 < 206: 사라지지 않는 > 스틸컷

영화 < 206: 사라지지 않는 > 스틸컷 ⓒ 찬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국가가 파묻은 비극을 보라
 
충격적인 건 영화 속 등장하는 어느 시신이다. 겨우 유치가 난 어린아이가 갓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어머니 등 뒤에서 발견됐다. 반세기를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땅 아래 눌려 있었을 이들의 유해가 시민발굴단의 손끝에서 햇빛을 봤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는 모두 208구, 그중 남자의 것은 고작 23구다. 대부분이 여성이고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산 일대 부역혐의자 체포가 주민들의 밀고로 알음알음 이뤄졌다고 전한다. 엄혹한 상황에 행여 북한군 동조자로 몰릴까 두려운 사람들은 일찌감치 도주했다. 정처 없는 도주행에 노모며 처자까지 데려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설마 힘없는 이들까지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예상은 비껴갔다. 경찰과 치안대는 부역 혐의자 대신 그 가족을 폐금광으로 끌고 갔다. 유해가 말해주듯 아직 말도 못하는 어린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데려갔다. 유해들은 까맣게 타 있었고 옷감이 뼈와 엉겨 붙어있었다. 208구의 시신 중 미성년으로 추정되는 것이 58구나 됐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 206: 사라지지 않는 > 스틸컷

영화 < 206: 사라지지 않는 > 스틸컷 ⓒ 찬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닌, '사라져선 안 된다'
 
발굴은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당시의 폭력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참혹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일깨운다. 아무리 전시라고 할지라도 군인도 아닌 민간인을, 심지어는 여성과 어린아이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무참하게 저지른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발굴은 이제야 겨우 이뤄졌고, 그마저도 정부 단체가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진행된 실정이다. 오늘의 한국이란 나라가 과연 선조 앞에 떳떳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는 발굴이 그저 땅에 묻힌 유해를 꺼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게 한다. 유해를 꺼낸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한 역사를 드러내 알리는 것이고, 그로부터 오늘의 세상이 지나간 사건을 제대로 알고 판단하도록 하는 일이다. 영화에서 담고 있듯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여전히 학살 피해 유족들이 있고, 그들 대부분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서 연좌제로, 또 반공이라는 이념으로 지속적인 피해를 입어왔다. 그 앞에 마땅히 사죄해야 할 국가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들이 너무나 선명하여 한 명의 국민으로서 민망하기 짝이 없다.
 
겨우 재출범한 진실화해위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위원장이 유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는 뉴스 따위가 간간이 들려온다. 다른 학살지에 대한 전면적 발굴이나 이제껏 발굴한 자리에 대한 재조사며 추모시설 설립 등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 206: 사라지지 않는 >은 그래서 다분히 역설적이다. 인간이 가진 뼈 206개가 나타내는 유골의 기록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서 그 유효함을 느낄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한 탓이다. 우리는 과연 역사 앞에 당당한가. 역사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웠다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일까. 정권과 정파에 따라 달라지는 위원회의 행태는 한국이 제가 저지른 과오 앞에 어떤 태도를 보여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명심할 것은 사라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잘못을 바로잡을 귀한 가능성이, 또 마땅히 사과를 받아야 할 이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게 아닌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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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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