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람들은 지구에 쓸 만한 에너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끝없이 열을 내뿜는 태양과 달리, 지구는 그저 차갑게 식어 있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돌아보게 했다. 원자핵을 쪼개고 또 합치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방출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지구엔 인간이 상상도 못할 에너지가 잠재돼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에너지를 어떻게 끄집어내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원자력은 인류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기존의 화석연료와는 비할 수 없는 효율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사례에서처럼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있는 위험이 되기도 했다. 또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경우에서 보듯이 원자력 발전에도 위험은 상존했다. 오류를 제 때 바로잡지 못한다면 수습이 불가할 정도로 문제가 번지는 모습을 두 참사가 보여줬던 것이다.
 
K-19 위도우메이커 포스터

▲ K-19 위도우메이커 포스터 ⓒ 파라마운트 픽처스

 
원자력 발전이 불러온 바닷속 참사
 
원자력 발전에 문제가 생긴 건 위 두 사례만이 아니다. 위 두 사례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뿐, 원자로가 훼손되고 방사능이 누출돼 노출된 사람들이 죽어나간 경우가 몇 차례 쯤 더 있었던 것이다. 그중 한 사건이 1961년 소련의 원자력 잠수함 K-19의 노심융융 사태다. 냉각수를 넣지 못해 핵 연료봉이 과열되고 녹아내려서 방사능이 유출된 사례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작은 버전이라 생각해도 좋겠다.
 
잠수함 승조원 여럿이 노심에 접근하여 용접작업을 한 끝에 사태를 겨우 수습하긴 했으나, 피폭된 이들 여럿이 죽음을 맞았고 적잖은 수가 후유증을 앓았다고 전한다. 냉전이 지속되는 내내 소련에선 이를 쉬쉬했으나, 소련이 해체된 뒤 마침내 세상에 알려진다.
 
K-19은 여러모로 소련엔 의미 깊은 함정이었다. 기존의 잠수함은 어뢰를 통해 적 선박과 잠수함을 격침시키는 전술무기로써 활용되던 무기인데 반하여, 잠수함에서 탄도미사일을 곧장 발사할 수 있는 소련 최초의 전략 잠수함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엔 핵탄두를 백여 개씩 갖고 다니는 원자력 잠수함이 여럿이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잠수함은 혁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K-19 위도우 메이커>는 위와 같은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소련의 이야기니만큼 그 후신인 러시아가 제작해야 마땅하겠으나, 영화산업에서 크게 앞서 있는 할리우드가 제작했다. 감독은 '남자보다 더 남자를 잘 아는 여자'로 불리는 캐서린 비글로우가 맡았다. 제임스 캐머런의 전 부인이란 사실이 늘 따라붙곤 했으나, 훗날 <허트 로커>로 당당하게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바로 그녀다.
 
K-19 위도우메이커 스틸컷

▲ K-19 위도우메이커 스틸컷 ⓒ 파라마운트 픽처스

 
할리우드가 제작한 소련의 실패
 
미국영화라서일까. 주연은 모두 미국인, 언어 또한 영어를 선택했다. 비글로우의 영화답게 이야기는 소련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당당하게 영어로 작품을 만드는 패기를 보인 것이다. 당대 소련의 경직성을 비판적으로 그리면서도 함 내에 타고 있는 승조원에 대해서는 존중의 시선을 잃지 않는 모습이 적잖이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진수를 앞둔 K-19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진수를 앞두고 군 간부들 앞에서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훈련을 하는 K-19호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 기계결함으로 훈련은 실패로 돌아간다. 군 간부들은 함장 미카일 폴레닌(리암 니슨 분)에게 책임질 사람을 지목하라 하고, 그는 제 이름을 댄다.
 
그 결과 K-19엔 새로운 함장이 부임한다. 새 함장인 알렉시 보스트리코브(해리슨 포드)는 2대째 군인으로, 아버지는 명예로운 인물이었으나 정치적 이유로 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말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고지식하고 엄격한 알렉시가 K-19 승조원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이니 잠수함의 첫 항해부터가 쉽지가 않다.
 
1960년대 어떤 때인가. 소련과 미국이 서로 질세라 군비경쟁에 열을 올리던 시기다. 핵탄도 미사일을 쏠 수 있는 잠수함, 즉 전략 원자력 잠수함을 두 나라가 개발해 실전배치한 것도 그런 흐름 속에 이뤄진 일이다. 소련이 서둘러 개발한 K-19을 일정을 앞당겨가며 출항시킨 것도, 마땅히 마련됐어야 할 위기대응책이 준비되지 않은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K-19 위도우메이커 스틸컷

▲ K-19 위도우메이커 스틸컷 ⓒ 파라마운트 픽처스

 
목숨을 바쳐 원자로를 수리한 이들
 
영화는 잠수함 원자로에 문제가 생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부함장으로 강등되었으나 승조원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미카일과 독불장군식 리더십으로 일관하는 알렉시의 갈등 또한 긴장감 있게 연출된다. 함정과 승조원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이와, 쓸데없는 위험을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의 대립은 서로가 물러날 공간이 얼마 되지 않는 잠수함이란 공간적 특수성과 맞물려서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원자력 발전소의 문제를 그린 여러 작품이 그러하듯, <K-19 위도우메이커> 또한 재난영화로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재난영화가 무엇인가. 극한의 상황에 내몰려 제 생명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된 인물들이 그로부터 선택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까발리는 장르가 바로 재난영화다. 문제가 생기면 돈과 지위 뒤로 숨고, 가까운 이들 품이나 집으로 도망치는 현실 속 선택지는 재난영화에선 허락되지 않는다. 위기 속에 내려진 선택이 인간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제가 상할 줄 알면서 원자로로 가서 작업을 하는 이들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제 목숨을 바쳐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영화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알렉시는 그것이 명예나 국가, 당의 인정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이 제 임무이고 책임이어서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가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상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인간은 기꺼이 저를 희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것이 그들이 그런 결정을 한 이유라고 말한다.
 
K-19 위도우메이커 스틸컷

▲ K-19 위도우메이커 스틸컷 ⓒ 파라마운트 픽처스

 
세계를 끝장낼 수 있는 무기로부터 사람을 구하다
 
핵무기를 싣고 운행하는 원자력 잠수함 승조원들이 누구를 위해 기꺼이 저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세계를 끝장낼 수도 있는 무기 곁에서 그를 다루는 군인들이 그저 누구를 상하게 하는 공격적인 존재만은 아니게 그려진다는 점이 적잖이 인상적이다. 비글로우의 손에서 태어난 K-19 승조원들은 그래서 미국을 지키는 군인들과도 얼마 다르지 않게 보인다. 서로 총구를 겨눈 적에게서도 차이보다는 같음을 발견하는 힘, 그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솜씨가 아닌가 말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한국 또한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할 예정이란 이야기가 들려온다. 최근 북한이 전략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했다고 발표한 상황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원자력 잠수함 건조는 군 전략상 불가피한 일로 여겨진다. 바야흐로 한반도 바다에서도 원자력 잠수함이 오가는 일이, 이미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이 공공연히 오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벌어지게 될 테다.
 
<K-19 위도우메이커>는 이 같은 국면에서 시사점이 적잖은 작품이다. 원자력 잠수함과 그에 실릴 미사일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또 이러한 무기 위에 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지를 생각해보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여전히 종전되지 않은 휴전국으로, 결코 남의 이야기일 수만은 없는 핵과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가 전쟁과 국가에 앞서 거듭하여 돌아본 것이 인간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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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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