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에 개봉한 송능한 감독의 <넘버3>는 개봉 당시 영화계에서 최고의 배우로 주가를 올리던 한석규에게 크게 의존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넘버3>는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 중 하나가 됐다. 송강호와 최민식이 나란히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배우로 자리잡은 가운데 한석규의 입지도 여전했으며 '재떨이' 역의 박상면도 인상적인 주조연급 배우로 인지도가 부쩍 상승했기 때문이다.

1999년에 개봉했던 김상진 감독의 <주유소 습격사건>도 마찬가지. 당시만 해도 영화계에서 확실히 입지를 잡지 못했던 이성재와 유오성이 이 작품을 통해 주연배우로 자리매김했고 신인이었던 유지태는 '충무로의 샛별'로 떠올랐다. 이 밖에도 용가리 역의 유해진과 용가리파 일당 중 한 명이었던 이종혁, 주유소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이요원도 시기는 각자 달랐지만 훗날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영화 중에는 지금은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스타배우들이 작은 역할로 출연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지금과는 다른 스타들의 풋풋하던 신인시절을 보는 것은 세월이 지난 옛 영화를 보는 빠질 수 없는 재미요소 중 하나다. 지금은 한 작품을 이끌어갈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박보영과 이민호, 문채원 등이 학생 역으로 출연했던 박광춘 감독의 2008년작 <울학교 이티>도 그런 영화들 중 하나다.
 
 <울학교 이티>는 전국65만 관객으로 흥행에 실패했지만 훗날 출연배우들이 스타가 되면서 관객들에게 재조명 받았다.

<울학교 이티>는 전국65만 관객으로 흥행에 실패했지만 훗날 출연배우들이 스타가 되면서 관객들에게 재조명 받았다. ⓒ 에스케이텔레콤(주)

 
선생과 학생들이 주인공인 학교배경 영화들

학교는 영화의 배경으로 쓰이기에 매우 편리한 공간이다. 학생이 주인공으로 나오든 선생님이 주인공이 되든 여러 장르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성장하는 감동스토리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고 교육적으론 좋지 않지만 선생님과 학생이 대립하는 내용의 코미디 역시 관객들에게 많은 웃음을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학교가 배경이 되는 영화들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학교 배경 영화 중에서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는 역시 1990년 아카데미 각본상에 빛나는 <죽은 시인의 사회>다. 미국의 입시명문학교에서 졸업생인 괴짜선생 존 키팅(고 로빈 윌리엄스 분)이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작품이다. 특히 토드 앤더슨(에단 호크 분)을 비롯한 학생들이 쫓겨나는 키팅 선생을 향해 책상 위로 올라가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치며 존경을 표하는 장면은 영화 역사상 최고의 엔딩 중 하나로 꼽힌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입시문제를 비판하고 선생님과 학생의 소통에 중점을 둔 영화라면 2003년에 개봉했던 잭 블랙 주연의 <스쿨 오브 락>은 음악을 통한 선생님과 학생들의 좌충우돌 스토리를 담은 영화다. <스쿨 오브 락>은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드라마로도 제작됐고 2015년에는 뮤지컬 버전이 공연되기도 했다. 개봉 10주년에는 잭 블랙과 출연진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연을 열기도 했다.

한국 영화 중에는 차승원의 첫 번째 단독주연영화로 유명한 <선생 김봉두>가 대표적인 학교 배경의 영화다. 서울에서 촌지를 받다 걸려 오지의 시골분교로 발령을 받은 초등학교 교사 김봉두가 전교생이 5명에 불과한 시골 아이들을 만나 감화된다는 내용의 코믹 드라마로 전국 247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지금도 코미디 전문배우 시절 차승원의 최고 연기로 <선생 김봉두>를 꼽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내일은 미스터 트롯> 시즌1에 참가했던 가수 김호중의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화한 <파파로티>는 노래에 재능이 있는 건달이 까칠한 지방 예고의 음악선생을 만나 성악에 눈을 뜬다는 내용의 음악 드라마다. 물론 실제 김호중이 겪었던 이야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파파로티>는 '연기장인' 한석규와 한창 떠오르는 신예였던 이제훈의 호연이 만나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학생 역할 배우들의 화려한 면면
 
 김수로는 <울학교 이티>에서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다양한 감정의 연기를 선보였다.

김수로는 <울학교 이티>에서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다양한 감정의 연기를 선보였다. ⓒ 에스케이텔레콤(주)

 
<울학교 이티>는 1998년 영화 <퇴마록>으로 데뷔해 <마들렌> <잠복근무>를 만들었던 박광춘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다. 유도선수 출신으로 체대를 나와 고등학교의 체육선생이 된 주인공 천성근(김수로 분)이 치열해지는 입시전쟁으로 체육선생에서 영어선생으로 변신한다는 내용의 학원 코믹물이다. <패밀리가 떴다>의 '게임마왕' 김수로를 단독주연으로 내세웠지만 전국 65만 관객을 모으는 데 그치며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단순히 흥행성적만 보면 '실패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울학교 이티>가 세월이 지난 후 관객들에게 새삼스럽게 회자되는 이유는 당시 학생 역할로 출연했던 배우들의 화려한 면면 때문이다. 전교 꼴찌 오상훈은 이듬해 초반 <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를 연기한 이민호가, 똘똘한 반장 한송이는 그해 겨울 <과속스캔들>로 800만 관객을 모은 박보영이 연기했다(두 사람은 2006년 EBS 청소년드라마 <비밀의 교정>에도 함께 출연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엄마에게 과외를 받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원조교제까지 시도하는 이은실 역은 <비밀의 화원>과 <찬란한 유산>으로 주목 받는 문채원이었다. 학생배우들 중 주인공에 가까운 백정구 역의 백성현 역시 2000년대 초반부터 이병헌, 최수종, 이서진, 권상우, 차인표 등의 아역을 도맡아 오던 스타 청소년배우였다. 차라리 청소년배우들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흥행에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물론 <울학교 이티>는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적지 않은 영화다. 체대 출신의 체육선생이 대학시절 열정 하나로 영어선생 자격증을 땄다는 설정부터 비현실적이고 무엇보다 천성근이 사표를 내고 학교를 떠난 이후에 나오는 정구의 복싱 장면이 지나치게 길었다. 만약 영화의 마지막 10분 정구의 복싱경기 장면만 본 관객이라면 <울학교 이티>가 유난스런 코치를 둔 고교생 복서의 이야기로 알았을 것이다.

사실 김수로는 20년이 넘는 연기 커리어 동안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적이 없고 연기대상보다 연예대상에서 받은 상이 더 많을 정도로 '연기 잘하는 배우'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김수로는 5수를 하면서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갔고 2011년에는 '김수로 프로젝트'라는 공연 브랜드를 만들어 연극계에 활기를 불어 넣었을 정도로 연기 열정은 누구 못지 않게 뛰어나다. <울학교 이티> 역시 김수로의 열정 넘치는 연기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영화다.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에게 신뢰 받는 반장
 
 박보영은 <울학교 이티> 개봉 3개월 후 <과속스캔들>을 통해 최고의 신예배우로 급부상했다.

박보영은 <울학교 이티> 개봉 3개월 후 <과속스캔들>을 통해 최고의 신예배우로 급부상했다. ⓒ 에스케이텔레콤(주)

 
지난 11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정신건강의학과 간호사 정다은 역을 섬세하게 연기하며 시청자들의 극찬을 받은 배우 박보영은 이제 믿고 보는 배우로 대중들에게 확실히 자리를 굳혔다. 그런 박보영이 아직 치열도 고르지 못하던 신인 시절에 조금은 촌스런 검정색 뿔테안경을 쓰고 출연했던 영화가 바로 똑똑하고 속 깊은 반장 한송이를 연기했던 <울학교 이티>였다.

박보영이 연기한 한송이는 학우들에게 높은 신뢰를 얻고 있으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최고의 모범생이다. 천성근 선생 역시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그동안 모은 돈 봉투를 송이에게 맡긴다(천성근이 주변의 어려운 학생들을 돕기 위해 모은 돈이다). 영화 중반 중학생처럼 보이는 송이가 어른 옷을 입고 은실이 어머니가 운영하는 노점상에 채소를 사러 와 어색하게 어른 흉내를 내는 장면은 뜻밖의 개그포인트다.

이민호는 집안도 부유하고 싸움도 잘하지만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언제나 전교 꼴찌를 도맡아 하는 오상훈 역을 맡았다. 하지만 성격도 안하무인인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나 <상속자들>의 김탄과 달리 오상훈은 학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와 됨됨이는 갖춘 캐릭터로 나온다. 실제로 상훈은 원조교제를 시도한 은실이 못된 어른에게 당할 뻔할 때 이를 발견하고 천성근과 함께 은실을 구해줬다.

<울학교 이티>는 학생배우들 외에도 단역으로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마저 대단히 화려하다. 천성근 선생이 대학시절 짝사랑했던 여학생 역할은 <왔다 장보리>에서 장보리를 연기했던 오연서였고 그 여학생과 눈이 맞아 성근을 차고 결혼하는 훈남 의사는 '1억 배우' 하정우였다. 그리고 천성근이 다니는 영문고의 이사장이자 주호식 교장(이한위 분)의 아내는 연예계 대표 동안배우 중 한 명인 김성령이 연기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울학교이티 박광춘감독 김수로 박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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