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그녀에게>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그녀에게> 스틸컷서울독립영화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나는 한 번 세운 계획은 꼭 이루고야 말거든."

언제나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인생을 살아온 유능한 정치부 기자 상연(김재화 분)에게는 큰 꿈이 있었다. 40대에는 정치부장, 50대에는 편집국장을 지내며 탄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올해의 기자상까지 받고 업계의 다른 동료, 선후배들에게까지 인정받는 그녀에게 있어 이 꿈은 그리 막연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이 임신을 한다거나 그들의 아이가 장애 판정을 받는 일은 그녀와 상관없는 오롯이 그들의 이야기였다. 양수가 터져 응급차에 실려가면서 내일의 취재 약속을 부탁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어렵게 얻은 쌍둥이 아이 중 둘째인 지우(빈주원 분)가 자폐 성향을 동반한 지적 장애, 장애 2급 판정을 받기 전까지 말이다.

영화 <그녀에게>는 류승연 작가의 에세이집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2018)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전직 기자이자 현직 장애 아이의 엄마로 장애 아동을 육아했던 작가의 10년 세월이 이 책 속에 담겨있고, 이상철 감독은 이를 스크린으로 옮겨냈다. 이 영화의 시작은 원작의 마지막 챕터에 해당하는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그녀에게'다. 작품의 타이틀 역시 여기에서 따왔다. 다만 영화의 많은 부분이 도서 전체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각색되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나아간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상연이라는 인물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너무 무겁거나 슬프게만 보이는 것을 조금은 경계한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현실적 상황에 의한 무게가 존재하지만 극 곳곳에는 관객이 스스로의 감정을 환기할 수 있을 만큼의 밝은 지점도 존재한다. 실제로 작품 곳곳에는 원작에 담긴 내용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고, 원작자 본인 역시 밝은 톤으로 영화가 완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02.
좋지 않은 결과까지 모두 상정하고 소원을 바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평범하고 일반적일수록 자신을 예외로부터 제외하고자 하는 것 역시 소원이 가진 모습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을 직접 마주하게 되면 과거의 소원은 더 이상 빛나는 환희로만 남을 수는 없게 된다. 영화 속 두 사람, 상연과 진명(성도현 분)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의 지적 장애 판정과 함께 소원은 원망이 된다. 함께 태어난 지수(이하린 분)와 달리 말은 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떼만 쓰는 지우의 모습 사이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던 부부의 모습이 삽입되어 있는 이유다.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온전히 바랐던 모습의 소원은 결코 아니다.

이 작은 사실 하나가 이들 가정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한다. 지연 발달이라는 작은 희망이라도 남아 있을 때는 그래도 나았다. 정확한 사실 앞에서 현실이 붕괴되는 속도는 더 빨라진다. 한 번 세운 계획은 꼭 이루고야 말았던 상연에게 이 현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기자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연의 사정은 이제 사소한 문제처럼 보인다. 가정을 지지하기 위한 균형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여유조차 사치스럽다. 그 막막한 상황 속에서 그 유능했던 사람조차 아들을 향해 자신의 인생이 저당 잡혔다며 원망 섞인 한탄을 내뱉는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그녀에게>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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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지고 나면 한동안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바닥에 닿아 주저앉은 현실과 달리 자신의 마음은 아직 그렇게까지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껏 함께 숨 쉬던 세계가 이제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 이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우리는 인식과 수용이라고 부르지만 막상 받아들이기는 어렵기만 하다.

걱정을 핑계로 주변에서 쏟아지는 참견들 역시 이들 가족에게는 큰 상처다. 가족은 가족대로 친구는 친구대로, 하지 않아도 좋을 괜한 노력을 위한답시고 해온다. 아무런 선택도 결정도 하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길잡이가 되려는 이들의 말과 행동이 두려움이 된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필요할 경제적 문제와 언제 나을 수 있을지, 나을 수 있기는 한 것인지 삼켜지지 않는 두려움이 삶 속에 혼재한다. 무엇보다 가장 슬프고 힘이 드는 건, 자신들과 다른 지우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멀리하는 또래들의 모습을 마주할 때다.

영화라는 인물, 상연이 대학 시절 학보사 활동을 하며 알고 지냈던 선배의 존재는 그래서 중요하다. 장애 아이를 키우는 동일한 상황을 먼저 지나온 그녀의 존재는 무엇 하나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너져 있던 상연을 다시 일으키고 붙잡는다. 적극적이고 강한 유대와 연대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이 앞으로 걸어야 할 지난한 과정을 먼저 걸어간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연에게는 힘이 된다. 훗날 영화의 마지막이 되면 그녀 역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화와 같은 대상으로 비슷한 역할을 해낼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다음의 일이다.

04.
이 작품에는 동력이라고 할 만한 게 특별히 따로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극이 새로운 상황을 하나 둘 더해나갈수록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러나간다. 물론 그 상황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수렁은 점차 더 깊어지기만 한다. 현재의 상황에 최대한의 노력으로 적응하고 또 적응하는 가족이지만 애석하게도 말이다. 지우를 일반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난 이후의 상황은 더욱 어렵기만 하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가족이 통제할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장애 등급 판정 문제와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부모의 극단적 선택을 보도하는 뉴스, 어려움을 호소하는 선생님과 퇴학 건으로 진정을 넣으려던 같은 반 학부모들까지. 상연에게는 어느 하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

쌍둥이, 아이가 둘이라는 것도 어려운 문제가 된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라면, 다른 어려움이 없다고 해도 부모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가족에게 지수는 언제나 두 번째다. 아니, 두 번째도 아닌 관심을 가져줄 수 없는 대상이다. 영화는 그런 상황 속에 내몰린 지수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포착해 낸다. 엄마 앞에서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며 모든 걸 홀로 감내하려는, 진짜 속마음은 드러내지 않으려는 작은 존재.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엄마인 상연이 안고 있을 심연의 깊이만큼이나 그 슬픔의 무게를 가늠해 보게 된다. 언제나 동생 지우만을 바라보고 챙기는 엄마, 하나의 엄마를 두고 언제나 양보할 수밖에 없는 그 세상 바깥의 마음이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그녀에게>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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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장애 아이 육아보다 더 힘든 건 세상의 시선이다."

일련의 사건을 뒤로하고 일반 학교가 지우에게 최선일지에 대해 생각해 달라던 담임의 요청은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물음과도 같다. 단순히 장애 아동을 가진 부모가 특수 학교와 일반 학교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영역이 아니다. 이 선택 이전에 사회가 그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지원하기 위해 적절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또 그들의 곁에서 동일한 시선과 태도로 머물러 왔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 대해 잘 몰랐다면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 애를 썼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물음은 러닝타임 내내 정신없이 아이를 보호하고 주변을 배려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인물에게 전해진, 이 문제의 근원적 질문과도 같다. 당신은 왜 그렇게 홀로 외롭게 싸워야만 했나요?라고.

영화의 후반부에는 갑작스러운 수술을 받은 지우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지는 장면이 있다. 상연은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들을 향해 깨어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건넨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 말의 뜻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 속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니 편하게 쉬어도 괜찮다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어쩐지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뜻으로도 이해되는 것은 왜일까? 이 장면 또한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더 이상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듣지 않을 수 있고, 약하고 아픈 마음을 홀로 견디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기대고 있는 원작의 이야기 속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06.
사랑은 홀로 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관계를 시작하게 하는 사랑도 그러할 것인데, 누군가를 지켜내는 사랑이 그렇지 않을 리 없다. 이 영화 속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사랑을 배운다. 마냥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렇기에 지켜낼 가치가 충분한 사랑을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던 지우가 단어 하나를 말하기 위해 애쓴다. 정확한 발음이 나오지 못하고 공중에서 흩어지지만 무엇인지 정확히 알 것 같다. 그녀에게, 영화의 종착점에 그녀가 서 있다.
영화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영화 그녀에게 김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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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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