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강조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주도하는 목종 정권을 전복시키는 선에서 그쳤다면, 1010년에 요나라의 침공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요나라에 대해서도 비우호적 태도를 취한 것이 전쟁을 부른 핵심 요인이 됐다.
강조는 단순히 천추태후·김치양 정권이 싫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게 아니었다. 이 점은 요나라 군대에 붙들려 죽음을 맞게 됐을 때 그가 보여준 결연한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이 장면은 그가 천추태후 커플보다 더 싫어했던 게 누구인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는 강조의 사망 연도가 1010년으로 기록돼 있지만, 현종시대 역사서인 <고려사> 현종세가에 따르면 그가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인 통주(通州)에서 요나라 군대에 사로잡힌 날은 음력으로 현종 1년 11월 24일이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011년 1월 1일이다.
강조가 사망한 것은 1011년인데도 1010년으로 잘못 표기된 것은 <고려사>에 나오는 음력 11월을 양력 11월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전년도 음력 11월은 이듬해 양력 1월과 겹칠 수 있으므로, 음력 11월을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으면 이런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
1010년 11월 24일이 아니라 1011년 1월 1일, 거란군 병사들에게 붙들린 강조는 포박을 당한 뒤 담요에 싸인 채로 요나라 성종 앞에 끌려갔다. <고려사> 김치양열전에 따르면, 요 성종은 포박을 풀어주면서 "너,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질문했다.
<삼국유사> 기이 편에 따르면, 신라 충신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고 결연히 밝혔다. 청나라 조정이 발행한 <만주원류고>는 "계(鷄)와 길(吉)은 음이 서로 부합하며 여러 지리적 관계를 조사해봐도 역시 딱 들어맞는다"라며 중국 길림성 지명이 신라를 뜻하는 계림에서 기원했다고 설명했다.
발해 건국 이전에 신라가 길림 지역을 잠시 지배했기 때문에 이곳이 한때 계림(중국 발음 지린)으로 불렸고 이를 근거로 중국어 발음이 똑같은 길림이란 지명이 나왔음을 보여주는 것이 <만주원류고>의 설명이다. 박제상은 그런 계림을 운운하며 자신은 신라 백성이지 왜국 백성이 아니므며 왜국에 충성할 수 없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박제상처럼 개·돼지 같은 자극적 표현을 써서 상대방을 자극하지는 않았지만, 강조 역시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다. 강조열전은 그가 "나는 고려인인데 어찌 너의 신하로 바뀔 수 있느냐?"고 맞섰다고 알려준다. 다시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칼로 살을 도려내며 질문해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강조 역시 박제상 같은 독종 충신이었던 것이다. 강조는 결국 처형됐다.
이 장면은 강조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것이자 거란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임금을 폐위시킨 경험이 있었다. 임금을 폐위시킬 수도 있는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만한 충성심을 표시한 것은 그가 그만큼 거란족을 경멸했음을 보여준다. 거란 황제가 직접 출동한 것은 그런 그를 제거하고 반거란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천추태후의 균형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