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고려왕조는 KBS 2TV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에 묘사된 거란족 요나라의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군사제도도 정비하고 군인 정원도 늘렸다. 이런 문제에 관한 기록인 <고려사> 병지(兵志)에 의하면, 제3대 정종 때인 947년에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군인 30만을 선발해 광군(光軍)에 배치했다.
 
또 고려 중앙군 조직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2군 6위'의 정비도 이뤄졌다. 위 책은 태조 왕건 때인 919년에 6위를 설치했다고 한 뒤, 993년의 제1차 고려거란전쟁(여요전쟁) 뒤인 1002년에 6위 군영을 만들고 장교와 군무원을 배치했다고 설명한다.
 
이 같은 군인 정원의 증가는 당연히 재정 증가를 불러왔다. 재정에 관한 기록인 <고려사> 식화지에 따르면, 천추태후 집권기인 음력으로 목종 1년 12월(양력 998.12.22~999.1.19)에 문·무 관료에 더해 군인도 전시과(田柴科) 지급 대상으로 명시되는 일이 있었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봉급 지급 방식인 전시과 제도의 대상자로 군인이 따로 명시됐던 것이다.
 
목종 때의 이 조치는 개정(改定)전시과로 불린다. 최초의 전시과인 시정(始定)전시과에는 무반에 대한 토지 지급은 명시됐지만, 무반 반열에 들지 못하는 하위직 군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랬다가 전시과를 개정하면서 무반과 문반에 더해 군인도 지급 대상으로 명기됐던 것이다. 거란과의 전쟁으로 군인의 지위가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위 식화지에 따르면, 시정전시과하에서 지급 대상으로 명시되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은 일률적으로 15결의 토지를 군인전으로 받았다. 이랬던 것이 개정전시과에서는 마군(馬軍)에게 23결, 보군(步軍)에게 20결이 지급되는 등의 상향 조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군비 증가는 고려 왕조가 감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군인 정원을 늘리고 군인전 지급을 확대하는 것에 더해, 속출하는 전사자와 그 유족에 대한 예우에도 상당한 비용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인 정원이 늘어나면서 벌어진 일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요나라 성종(요성종)이 1010년에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침공한 명분은 고려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옹립한 강조(康兆)의 반역을 응징해준다는 데 있었다. 그 결과, 강조는 1011년 1월 1일(기록상 날짜는 음력 11.24) 거란군에 붙들려 죽임을 당했다. 전투 초반에 거란군을 크게 격파한 강조가 방심한 나머지 한가롭게 바둑을 두다가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은 강조 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현종 편에 따르면, 강조가 죽임을 당할 때 3만 고려군도 함께 전사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정부는 전사자보다 유족을 더 어려워하고 두려워한다. 3만 전사자의 유족을 위로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로 인한 재정 부담을 감내하기 힘들게 되자, 고려 조정은 군인과 유가족을 자극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군인전을 거둬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현종 편은 1010년 이후에 군인 정원을 늘린 것으로 인해 조정 신하들의 녹봉이 부족해지자, 개경에 주둔하는 경군(京軍)의 토지를 회수하는 일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지난 17일 방영된 <고려거란전쟁> 제25회에서 이에 관한 어전회의 장면이 묘사됐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군인들의 발언권이 강해진 상태에서 취해진 이 조치는 불상사를 낳았다. '김훈·최질의 난'이 이 때문에 일어났다. 이때가 1014년이다. 정중부·이의방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때가 1170년이다. 이보다 156년 전에 김훈과 최질이 초기 형태의 무신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고려사> 현종세가(世家)에 따르면, 김훈과 최질은 1014년 11월 25일(음력 11.1) 쿠데타를 일으켰다. '개경의 가을'을 일으킨 이들은 무신이 문신 직책을 겸직해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어사대를 금오대로 고치고 삼사를 도정서로 고치는 등의 행정 개편도 단행했다.

1170년의 정중부·이의방은 정변 이틀 뒤인 그해 10월 13일(음9.1)에 허수아비 임금인 명종을 옹립했다. 김훈·최질의 쿠데타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이는 현종이 역전의 승부수를 던지는 발판이 됐다.
 
고려 수도인 개경과 북진 기지인 서경(평양)은 라이벌 관계였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진압한 1135년의 묘청의 난 역시 양대 세력의 투쟁이었다. 김훈·최질 쿠데타 이듬해인 1015년에 현종이 구사한 방식은 서경 군대를 이용해 김훈·최질의 개경 군대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훈·최질의 경군에 포위된 현종이 서경군을 불러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서경군이 움직이면 김훈·최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이 구사한 방식은 구한말의 고종이 선택한 것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1894년에 동학군을 진압하겠다며 조선에 들어와 경복궁까지 점거한 일본군으로 인해 고종은 한동안 허수아비로 살았다. 그랬다가 1896년에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가 인근의 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가 일본의 간섭에서 비로소 벗어났다(아관파천).
 
고려 현종이 서경으로 행차한 이유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고려 현종이 택한 방식은 조선 고종과 비슷한 일면이 있지만, 고종처럼 외세 의존적이지도 않고 이동거리가 짧지도 않았다. 현종은 평양으로 행차해 그곳 고려군의 힘을 이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런 아이디어를 제공한 신하는 이자림(李子琳) 전 화주방어사다. 이자림은 궁궐 당직자에게 "왕께서는 어찌 한고조(漢高祖)가 운몽(雲夢)에 행차한 것을 본받지 않으십니까?"라는 말을 건넸다. 공신인 한신(韓信)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자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한신을 운몽 땅으로 유인해 체포한 일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김훈·최질을 개경 밖으로 유인해야 한다는 암시였다.
 
이자림이 황제로 지칭되는 자기 군주를 '왕'으로 불렀을 리는 없다.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왕조 하에서 편찬된 책이다 보니 고려를 폄하할 목적으로 '왕'이란 표현이 들어갔을 뿐이다. 이자림의 입에서 나온 실제 표현은 황상이나 주상 혹은 임금 등이었을 것이다. 황상 폐하가 '개경의 가을'을 진압하려면 주모자들을 도성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은 이처럼 이자림의 아이디어였다.
 
이 계책을 받아들인 현종은 이자림에게 임시직을 주어 평양에 미리 가 있도록 했다. 서경 근무 시절에 현지 인심을 얻은 이자림이 평양에 가서 사전 준비를 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현종이 이동해야 하는 거리는 경복궁-러시아공관 구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개경을 몰래 빠져나가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이때 마침 현종이 명분으로 삼을 만한 일이 있었다. 1015년 연초에 거란군이 압록강에 교량을 가설하고 전방 지역인 흥화진과 통주를 침공한 일이다. 이로 인해 위기가 고조되는 상태에서 현종은 그해 3월 25일(음3.3)에 서경으로 행차했다.
 
누가 봐도 거란의 침입에 맞서 전방 부대들을 독려하기 위한 행차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김훈·최질이 행차를 막지 못한 것은 그 명분이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평양 도착 11일 뒤인 4월 5일(음3.14), 현종은 행동에 착수했다. "왕이 장락궁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김훈·최질 등 19인을 주살했다"고 현종세가는 말한다.
 
거란과의 군사 대결이 계속되던 시절에 군인 처우문제 때문에 발생한 김훈·최질의 난은 고려의 국운을 위태롭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 틈을 타서 거란이 고려를 집어삼킬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은 '한고조 운몽 행차'의 고사를 응용해 반란군 수뇌부를 평양으로 유인해 서경 군대의 힘으로 이 위기를 모면했다.
고려거란전쟁 여요전쟁 고려현종 전시과 군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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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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