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어울리는 콘텐츠가 있다. 봄이면 장범준이, 여름이면 DJ DOC가, 가을엔 발라더들이, 겨울엔 머라이어 캐리가 웃는다는 이야기가 오로지 음악판에만 도는 것은 아니다. 영화도 계절을 탄다.

거리에 온통 떨어지는 낙엽으로 가득한 가을이다. 이 계절과 어울리는 영화가 무엇인지를 두고 영화팬이라면 이야기를 나눠본 일이 있을 것이다. 가을의 정취가 가득한 영화, 가을의 영상, 가을의 음악, 가을의 얼굴이 나오는 영화. 가을을 어떤 계절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겠으나 오늘 소개할 영화가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리라는 데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씨네만세'에서 다룰 영화는 김태용 감독의 대표작으로 고전 한국영화를 독자적 시각으로 변주해 다시 만든 <만추>다. 제목에서부터 늦을 만에 가을 추를 붙여 스스로 가을을 염두했음을 적나라하게 밝힌다. 무엇이 이 영화로 하여금 늦은 가을을 이야기하도록 하였을까, 또 무엇이 이 영화가 늦은 가을을 말할 수 있게 하였을까.
 
이 영화로 김태용 감독은 탕웨이를 아내로 맞았다. 탕웨이는 이 영화로 한국에서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로부터 열 두 해가 지난 가을, 공들인 리마스터링 작을 재개봉하기까지 어떤 마음들이 있었을지를 떠올린다. <만추>는 늦었지만 늦지 않은 영화다. 한국 관객들은 여전히 이로부터 어떠한 감상을 얻을 것이므로.
 
 <만추> 리마스터링 포스터

<만추> 리마스터링 포스터 ⓒ (주)에이썸 픽쳐스

 
이 계절과 잘 어우러지는
 
영화는 방황하는 여자의 얼굴로부터 시작한다. 여자는 남편을 살해하고 집을 뛰처나온 참이다. 어디로 갈지 몰라 주저하던 그녀가 곧 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애나(탕웨이 분), 여성 교도소에 수감된 수인번호 2537번 수형수다. 남편을 살해한 죄로 7년 째 수감 중인 그녀가 교도소를 나온다. 어머니의 부고로 며칠의 휴가가 허락된 것이다.

버스를 타고 시애틀에 있는 집으로 향하는 애나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두들겨 잡은 사내가 애나에게 다가와 돈을 꿔간 것이다. 버스비도 없이 버스를 세운 이 막무가내의 이름은 훈(현빈 분), 그는 버스 옆자리에 앉아 애나에게 제 시계를 벗어준다. 꼭 돈을 갚을테니 그때까지 시계를 갖고 있으란 얘기다.

영화는 애나와 훈, 각각의 사연을 설명한다. 돌아온 집에서 애나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 가족들은 남편을 죽이고 교도소에 들어간 애나의 사연을 쉬쉬하고, 그녀가 중국에 들어갔다 왔다고 말한다. 엄마의 죽음에도 오빠 부부는 식당지분을 제대로 챙겨 받을 수 있을까만 관심이 있다. 목청 높여 싸우는 가족들 사이 애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바깥을 거닌다. 그러다 한때 사랑했던 왕징(김준성 분)을 만난다.
 
 <만추> 리마스터링 스틸 이미지

<만추> 리마스터링 스틸 이미지 ⓒ ㈜에이썸 픽쳐스

 
여죄수에게 주어진 며칠 간의 외출
 
더없이 사랑했던 왕징과의 관계는 그녀의 삶 전체를 비틀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왕징은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 죄인의 신분으로 그를 다시 보는 애나의 마음 또한 착잡하기 그지없다. 쌓인 시간으로 덮였을 뿐, 정리되지 않은 관계를 그들은 마주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하지도 못한다.
 
훈의 이야기도 가관이다. 훈은 여자를 상대하고 돈을 받는, 쉽게 말해 미국 한인사회를 휩쓸고 다니는 제비다. 최근에 한 여자를 깊이 만났지만, 그녀의 남편이 훈을 의심한 탓에 도망치기에 이른 것이다. 막무가내인 남편이 사람을 사서 훈을 죽일 거라는 얘기까지 도는 모양, 하지만 훈은 특별한 심각성은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세상 무엇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훈 앞에 세상 모두가 무겁기만 한 애나가 나타나고 둘은 예고된 관계로 향해간다. 시애틀에서 결코 유쾌하지 않은 시간을 보낸 애나를 우연히 마주한 훈은 빚을 갚고 시계를 받는다. 둘은 함께 시애틀의 밤을 활보하며, 기약 없던 사건들을 운명처럼 마주한다. 외로움과 호기심 사이, 서로에게 차츰 젖어드는 모습이 여느 남녀처럼 애처롭고 아름답다.
  
 <만추> 리마스터링 스틸 이미지

<만추> 리마스터링 스틸 이미지 ⓒ ㈜에이썸 픽쳐스

 
"오랜만이네요" 연습해본 적이 있다면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가리켜 가을을 담았다고 말한다. 코트를 입고 깃을 세운 현빈과 떨어진 낙엽의 정취를 얼굴 가득 담은 탕웨이의 존재가 더없이 가을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의 배경 또한 가을이며, 안개 자욱한 시애틀이란 도시의 정취 또한 가을과 닮아 있다. 한국 어느 시골의 논밭을 담았다면 더없이 풍요로울 가을이, 이국의 안개 낀 도시를 잡으니 텅 빈 주머니와 헛헛한 마음, 그리하여 어딘가 기대어 쉬고픈 처연함과 비슷하다.
 
김태용 감독은 <만추>로부터 어느 사랑의 이뤄짐을 담지 않는다. 피어났으나 거둬지지 못한 채 익어가는 사랑을 말한다. 가을은 나고 가득 찼으나 어느덧 기울어 지나가기 직전이다. 그리하여 가을 앞에 늦었다는 표현이 붙고야 말았다. 늦은 가을 지나간 사람을 기다리는 애나 앞에 훈이 나타날 것인지 기약이 없다. 감독은 그 뒤 다가올 계절을 굳이 잡지 않고 엔딩크레딧을 올린다. 그리하여 애나는 오가는 이 없는 휴게소 카페에 앉아 "오랜만이네요."하는 말을 연습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떠올리게 된다. 누구를 위하여 "오랜만이네요."하는 말을 연습해본 적이 있는지를, 생애 그런 이를 가져보았는지를, 삶의 어느 엇갈림으로부터 그러나 놓지 못하는 기억이 있는지를 말이다. 겨울이 오지 않았다면, 늦어도, 계절은 가을이다.
 
 <만추> 리마스터링 스틸 이미지

<만추> 리마스터링 스틸 이미지 ⓒ ㈜에이썸 픽쳐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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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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