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은 현종 임금과 강감찬 장군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1일 첫 방송은 1019년 귀주에서 고려군이 강감찬(최수종 분) 지휘하에 거란군과 치열하게 전투하는 장면부터 보여줬다.
 
이 전투를 짤막히 보여준 뒤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미래의 현종 임금인 대량원군(김동준 분)이 목종(백성현 분)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이민영 분)로부터 한도 끝도 없는 탄압을 받는 장면을 묘사했다. 승복을 입고 피해 다니는 대량원군이 이모인 천추태후의 살해 위협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나가는 스토리가 제1회에서 전개됐다.
 
이 드라마의 배경인 11세기는 한 세기 전에 시작된 새로운 질서의 연장선이었다. 한반도에서 궁예·견훤·왕건 등이 경쟁한 서기 10세기는 동아시아 전체적으로도 대격변의 시대였다.
 
9세기 후반부터 분열 양상을 보이며 후삼국 시대로 이행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은 탐라를 제외한 강토가 936년 고려에 의해 통일됐다. 한편, 동몽골에서는 거란족이 10세기 초에 아율아보기의 주도로 부족 통일을 이루고 뒤이어 대요(大遼·요나라)를 건국했다. 이 여파로, 발해 땅이던 만주가 926년에 거란족의 차지가 됐다.
 
 <고려 거란 전쟁> 포스터

<고려 거란 전쟁> 포스터 ⓒ KBS

 
대혼란의 최대 수혜자는 거란족

기원전 111년에 한무제가 남월을 멸망시킨 이래로 중국의 직간접적 지배를 받은 베트남에서는 중국 세력에 맞서는 응오꾸옌이 939년에 왕을 칭할 정도로 강해졌다. 응오꾸옌의 칭왕이 있은 뒤인 966년에는 딘보린이 칭왕보다 더 나아간 칭제를 하며 황제국을 선포했다. 딘왕조(966~980)의 시작이다.
 
베트남 북쪽인 지금의 중국 윈난(운남)에서는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다가 938년에 대리국이 세워졌다. 이 나라는 몽골 쿠빌라이칸에 의해 1253년에 멸망할 때까지 3백여 년간 이어졌다.
 
이 같은 대혼란의 최대 수혜자는 거란족 요나라다. 이 나라는 이전의 유목민들이 시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남하하는 데 성공했다.
 
종전의 유목민들은 개별적 혹은 소규모로 만리장성을 남하해 중국에 정착한 뒤 서서히 힘을 길러 자신들의 왕조를 세웠다. 다섯 유목민족이 북중국에 16개 왕조를 세운 5호 16국 시대(304~439년)는 그런 현상의 결과물이다.
 
이와 달리 거란족은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만리장성 이남을 정복했다. 이 전철을 밟은 것이 여진족과 몽골족이다. 거란족은 10세기의 대혼란을 이용해 유목민의 중국 정복에서 선구적 발자취를 남긴 민족이다.
 
국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집단이다.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그 같은 국가권력들이 서기 10세기 동아시아에서 대대적으로 동요했다. 한두 곳도 아니고 아시아 동부가 그런 격변에 휩싸였다. 서기 10세기 사람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대혼란은 당나라가 약해지면서 곳곳에서 분출됐다. 당나라의 쇠망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말기에 지방장관인 절도사들이 발호하면서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진 것과 무관치 않는 현상이다.
 
절도사들의 할거로 인해 국경 밖에 대한 당 왕조의 영향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궁예와 견훤이 중국의 개입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활약한 데는 이런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혁명에 실패한 19세기의 전봉준이 누리지 못한 이점을 서기 10세기 반정부 지도자들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절도사들의 발호로 인한 정치적 혼돈은 당나라 뒤에 등장한 송나라가 문치주의를 강화하는 동기 중 하나가 됐다. 칼을 쥔 지방장관들로 인해 세계적 왕조가 멸망에까지 도달한 경험은 송 왕조가 붓을 쥔 신하들을 더 선호하게 만들었다. 이는 송나라의 군사력이 약해져 유목민의 침입에 더 쉽게 노출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기 10세기의 이 혼란은 동아시아를 움직이는 힘의 축도 바꿔놓았다.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9세기까지 동아시아를 주도한 양대 세력은 중국 왕조와 서북쪽 유목민들이다. 중국 황하를 기준으로 9시~12시 방향에 있는 유목국가들이 동아시아 최강국 지위를 놓고 중국 왕조와 경쟁하는 양상이 이 기간에 전개됐다. 흉노족·선비족·돌궐족·위구르족의 중국 압박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9~12시가 강했던 그 시절에 고구려는 0~3시 방향에 있었다. 0~3시가 강해지기 힘든 시절에 고구려는 예외적으로 막강한 국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시운과 대세가 이롭지 못해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다.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에도 동아시아를 움직이는 두 힘은 9~12시와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츠펑시(적봉시)의 바린좌기(파림좌기)에서 찍은 요나라 역사 벽화. 아율아보기에 관한 부분이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츠펑시(적봉시)의 바린좌기(파림좌기)에서 찍은 요나라 역사 벽화. 아율아보기에 관한 부분이다. ⓒ 김종성

 
그런 구도에 일대 변화가 생긴 것이 10세기다. 이때부터는 동몽골과 만주가 있는 0~3시가 중국과의 패권 대결을 주도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그 뒤 서북쪽 유목민들과의 대결에 전력을 기울여 이들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돌궐족이 서쪽으로 밀려나 동유럽과 중동에서 투르크족의 역사를 쓰게 된 것은 이로 인한 결과다.
 
당나라가 서북쪽 토벌에 주력하는 사이에, 발해는 만주에서 경제력을 키워갔다. 특히 농업을 발달시켰다. 일례로, 해란강 유역에서는 벼가 발해 특산품이 되고, 두만강 부근에서는 콩 농업이 발달해 발해 메주가 호평을 받게 됐다.
 
발해의 농업 발달은 소뼈 유물로도 증명된다. 발해 전기에 매장된 소뼈 중에는 어린 소의 뼈가 많은 데 비해, 후기에 묻힌 소뼈 중에는 늙은 소의 것이 많다. 이는 후기로 갈수록 소를 농경에 이용하다가 소가 늙으면 도살하는 일이 많았음을 보여준다고 해석되고 있다.
 
이렇게 발해가 일군 경제력이 10세기 이후에 0~3시가 강해지는 토대 중 하나가 됐다. 그런 경제적 업적을 이룬 발해는 10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926년에 멸망하고, 거란족·여진족 등이 그 결과물을 향유하며 북중국 진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대혼란의 시대인 서기 10세기는 한민족에게 기회였다. 하지만 한민족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10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를 잃게 됐다. 그 뒤 고려는 거란족·여진족·몽골족의 연이은 침략에 노출됐다.
 
한민족의 주 무대가 만주에서 한반도로 축소됐기 때문에 유목민에 대한 한민족의 방어망도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반도 사람들이 유목민의 침략으로 생명과 재산을 더 쉽게 잃게 되는 환경을 조성했다.
 
기회가 왔지만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 것은 10세기 한민족의 비운이었다. 그런 비운이 누적되면서 거란족의 침략에 쉽게 노출된 때가 <고려거란전쟁>의 배경인 서기 11세기다. 만주라는 방어막을 상실해 유목민 앞에서 취약해진 한민족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가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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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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