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을 연출하는 곽재용 감독의 장편 데뷔작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고 신성일의 아들 강석현과 신예스타 옥소리 주연의 멜로 영화로 서울관객 6만 4000명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영화개봉 3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오늘날 영화를 기억하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지만 강인원, 권인하, 고 김현식이 불렀던 동명의 주제가는 여전히 명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실 영화, 특히 멜로 영화는 영화 제목과 같은 주제가가 영화 못지 않게 많은 사랑을 받을 때가 있다. 허진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한석규와 심은하가 출연했던 < 8월의 크리스마스 >는 주연배우 한석규가 직접 부른 주제가가 크게 화제가 됐다. 허진호 감독의 차기작이었던 이영애, 유지태 주연의 2001년작 <봄날은 간다> 역시 자우림 김윤아의 솔로 1집 타이틀곡 <봄날은 간다>가 영화의 엔딩송으로 쓰이며 영화와 노래가 동시에 사랑 받았다.

이렇게 영화 제목과 같은 제목의 주제가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우연히 영화와 노래의 제목이 겹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가끔은 제작사나 감독이 의도적으로 노래 제목을 영화 제목으로 지을 때도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간 남편을 만나기 위해 베트남전 위문 공연단에 들어간 주인공 순이의 모험담(?)을 그린 이준익 감독 연출, 수애, 정진영, 정경호 주연의 영화 <님은 먼 곳에>였다.
 
 <님은 먼 곳에>는 <라디오스타>와 <즐거운 인생>을 잇는 이준익 감독 '음악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님은 먼 곳에>는 <라디오스타>와 <즐거운 인생>을 잇는 이준익 감독 '음악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 (주)쇼박스

 
우연 또는 의도로 노래 제목과 같은 영화 제목

영화 제작사와 감독은 영화 제목을 지을 때 엄청난 고민을 한다. 촬영할 때 지어놓았던 가제가 개봉을 앞두고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화의 제목이 영화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은 영화 제목이 우연히 이미 발표된 노래의 제목과 겹치는 경우도 있고 의도적으로 노래 제목과 영화 제목을 똑같이 짓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미 개봉한 영화와 같은 제목의 노래가 뒤늦게 발표되기도 한다. 

지난 1992년에는 안정효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안성기, 이경영 주연의 영화 <하얀 전쟁>이 개봉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트라우마를 주제로 한 <하얀 전쟁>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휩쓴 수작이다. 그리고 1997년 겨울에는 혼성그룹 영턱스클럽이 3집 타이틀곡 '하얀 전쟁'을 발표했다. 하지만 영턱스클럽의 '하얀 전쟁'은 커플이 눈싸움을 하다 싸움이 커지면서 마음이 상해 헤어졌다는 전혀 다른 내용의 노래다.

'소원'은 노래제목으로 단골로 쓰이는 단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다시 돌아와 달라고 빌거나 그 사람을 잊게 해달라고 비는 내용의 슬픈 발라드에 흔히 쓰인다. 20세기에는 김현성과 일기예보, 2017년에는 어반자카파가 '소원'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른 바 있다. 하지만 2013년에 개봉했던 이준익 감독, 설경구, 엄지원, 이레 주연의 <소원>은 2008년에 있었던 아동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매우 심각한 영화였다.

<챔피언>은 2002년 곽경택 감독이 고 김득구 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복싱영화였고 2018년에는 마동석 주연의 팔씨름 소재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다.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이 시종일관 비장한 분위기로 진행됐다면 마동석의 <챔피언>은 코미디 요소가 적지 않게 섞여 있다. 그리고 '챔피언'은 2002년에 발매됐던 싸이 3집 타이틀곡으로도 유명하다. 싸이의 '챔피언'은 '강남스타일'이 나오기 전까지 싸이를 대표하는 노래였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1980년대 '전설의 록밴드' 들국화의 1집 수록곡으로 들국화의 명곡들 중 가장 유명한 노래로 꼽힌다. 고 최동원과 선동열의 명승부를 영화화한 <퍼펙트게임>에 삽입되기도 했던 '그것만이 내 세상'은 2018년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전직복서가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동생과 만나 가까워지는 내용의 휴먼 코미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는 엔딩곡으로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을 들을 수 있다.

남편 찾아 위문 공연단 자처한 순이의 모험
 
 수애는 <님은 먼 곳에>를 통해 대종상과 부일영화상을 비롯해 5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수애는 <님은 먼 곳에>를 통해 대종상과 부일영화상을 비롯해 5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주)쇼박스

 
'깨끗하고 순수하다'는 의미를 가진 청순하다와 '단정하고 아담하다'는 뜻을 가진 단아하다는 일상에서 비슷하게 쓰일 때가 많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느낌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청순하다'는 드라마 <피아노> 시절의 김하늘, 영화 <클래식>과 드라마 <여름향기> 시절의 손예진을 생각하면 쉽고 '단아하다'는 배우 수애를 떠올리면 된다. 그만큼 수애는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배우들 사이에서도 '단아함'을 상징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님은 먼 곳에>에서 수애는 상급자를 구타하고 영창 대신 베트남전에 파병된 남편 상길(엄태웅 분)을 찾기 위해 위문 공연단 밴드의 보컬로 합류해 전쟁 한복판에 뛰어드는 순애 역을 맡았다. 동네 아주머니들 앞에서 김추자 노래를 부르며 박수를 받던 '동네가수' 순이가 졸지에 미군들 앞에서 춤을 추면서 팝송을 부르게 된 것이다. 당연히 수줍은 성격의 순이가 이를 잘 소화할 리 없었고 밴드는 제대로 공연도 해보지 못하고 파행위기에 놓인다.

그러던 중 순이는 정만에게 미군이 아닌 한국군을 상대로 공연을 하자고 제안하고 한국군을 상대한 위문공연에서 한국노래를 부르며 뜨거운 호응을 얻는다. 그렇게 베트남에서 잘 나가는 위문공연 밴드의 보컬로 이름을 날리던 순이는 베트남 군인들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지만 미군들에 의해 살아나 극적으로 행방 불명됐던 남편 상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순이는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만난 상길에게 뜬금없이 '따귀 5연타'를 날리고 눈물을 흘린다.

순이와 상길의 극적인 부부 상봉이 이뤄지는 엔딩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하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엄청난 고생 끝에 남편을 만난 순이의 행동은 격렬한 키스도, 감격의 눈물도 아닌 '분노의 따귀'였다. 이 때문에 <님은 먼 곳에>의 엔딩이 허무했다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남편을 찾아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까지 날아온 순이의 감정은 관객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을 것이다.

<님은 먼 곳에>는 <라디오스타>와 <즐거운 인생>으로 이어진 이준익 감독 '음악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한 영화였다. 음악 3부작 중 독보적으로 많은 7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님은 먼 곳에>는 전국 170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수애는 영화 속에서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와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 그 시절의 히트곡들을 직접 부르며 의외의 노래실력을 뽐냈다.

왕-장군 전문 배우의 사기꾼 연기
 
 '이준익 감독의 페르소나' 정진영(오른쪽)은 <님은 먼 곳에>에서 사기가 몸에 밴 밴드마스터 정만을 연기했다.

'이준익 감독의 페르소나' 정진영(오른쪽)은 <님은 먼 곳에>에서 사기가 몸에 밴 밴드마스터 정만을 연기했다. ⓒ (주)쇼박스

 
배우 정진영은 <황산벌>을 시작으로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 <평양성> <자산어보> 등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김유신 장군 역할만 두 번(<황산벌> <평양성>)이나 했고 <왕의 남자>에서는 연산군, <자산어보>에서는 정조대왕을 연기하며 왕 역할도 두 번이나 맡았다. 해체된 밴드를 재결성하기 위해 친구들을 모으는 기영을 연기했던 <즐거운 인생>이 그나마 이준익 감독이 정진영에게 맡긴 가장 평범한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님은 먼 곳에>에서 정진영에게 한국에서 돈을 꿔 베트남에서 날리고 베트남에서 사기 쳐서 한국으로 도망치는 인간 쓰레기이자 위문 공연단의 밴드마스터 겸 섹소폰 주자 정만 역을 맡겼다. 정만은 같은 밴드 동료의 돈도 사기 칠 정도로 구제불능인 인물이지만 생존본능이나 임기응변은 매우 뛰어나다. 미군들에게 처형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 국가를 부르며 극적으로 위기에서 탈출했던 장면이 대표적이다.

율제병원 흉부외과 과장 김준완과 전국 최고의 일타강사 최치열을 연기하며 데뷔 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정경호는 2008년 <님은 먼 곳에>에서 정만에게 사기를 당한 용득 역을 맡았다. 영화 중반까지는 순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공연을 하던 부대가 폭격을 당하고 다리를 다쳤을 때 순이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 후 순이에게 호감을 갖는다. 용득은 순이가 남편을 만나기 위해 헬기를 탔을 때 순이를 끌어 내리려는 군인들을 막기도 했다.

<님은 먼 곳에>에서 순이의 남편 상길을 연기한 엄태웅은 당시 드라마 <부활>과 <마왕>,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출연하며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님은 먼 곳에>에서는 초반과 후반에만 등장하고 순이가 남편을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상길은 영화 마지막에 극적으로 살아나 순이와 상봉하지만 따귀 5연타를 맞고 어린 아이처럼 주저 앉아 눈물을 흘린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님은먼곳에 이준익감독 수애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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