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를 위시한 OTT 서비스를 타고 K콘텐츠의 위용이 전 세계에 미치는 세상이다. 한국 배우가 할리우드 스타 못잖은 인기를 구가하고 작가며 연출자의 이름을 꿰고 있는 해외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킹덤> <오징어 게임> < D.P. >로 이어지는 한국 드라마의 성취는 올해 <무빙>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바야흐로 한국 드라마가 세상을 매혹해낸 것이다.
 
한 나라의 드라마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강타한 것이 최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반세기도 더 전에도 한국 안방에서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드라마를 그대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 멀더와 스컬리가 외계생명체를 추적하는 <엑스파일> 같은 드라마는 <프리즌 브레이크> 이후 이어진 미드 열풍보다 십수년 앞선 1990년대부터 초등학생 가운데 보지 않은 이가 없을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국 드라마뿐이 아니다. 영국 드라마 역시 전 세계를 강타한 시절이 있다. 영국에서만 평균 시청률이 30%에 달할 만큼 큰 인기를 누린 <닥터 후>는 여섯 번째 뉴 시즌부터 미국 로케 등 할리우드 진출을 적극 시도하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일곱 번째 시즌은 그 정점으로,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얼마 되지 않는 시차를 두고 상영할 만큼 시장을 키웠다. 전 세계 수천만 시청자, 그중 열성적인 후비안만 수백만은 족히 된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닥터 후: 닥터의 날> 포스터

<닥터 후: 닥터의 날> 포스터 ⓒ BBC

 
50주년 된 드라마, 기네스 기록까지
 
뉴 시즌 7이 종영된 뒤 나온 몇 편의 스페셜은 BBC가 이 드라마에 얼마나 큰 자부심이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닥터 후: 닥터의 날>은 그 정점으로, 주연인 세 명의 닥터에 더해 이제까지 출연한 모든 닥터들과 앞으로 출연할 닥터 일부까지 볼 수 있는 귀한 회차라 하겠다.
 
이와 관련한 BBC의 대대적 홍보 덕분인지 <닥터의 날>은 평균 시청률 40%를 넘겼고, 시청인구 기준으로 1280만 명이 동시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다. BBC는 이례적으로 94개국에 동시 상영을 허가했는데, 이로써 전 세계 1500여 개 상영관에서 동시 상영된 드라마라는 기네스 기록까지 세우게 된다.

수석작가인 러셀 T. 데이비스의 하차 뒤 뉴 시즌 5부터 이야기를 이끌어온 스티븐 모팻은 이야기의 질적 하락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외연에 있어서는 드라마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좋은 드라마는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과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스티븐 모팻의 <닥터의 날>은 증명했다. 동시 시청자만 수 천 만, 누적 시청자는 수억 명을 헤아린다는 평가를 받은 이 드라마는 향후 OTT 시장의 중심이 영화가 아닌 드라마가 될 것임을 많은 제작자에게 증명했다. 팬들은 재생성을 통해 새 배우가 이어받는 닥터에게 매번 새롭게 열광했다. 가죽자켓에서 수트로, 나비넥타이와 우스꽝스런 모자로 패션아이템이 변화할 때마다 이를 현실에서 따라 쓰는 이들이 적지 않게 생겨났다. 드라마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직감했다.
 
 <닥터 후: 닥터의 날> 스틸컷

<닥터 후: 닥터의 날> 스틸컷 ⓒ BBC

 
세 명의 닥터가 한 자리에... 금기 깬 대작
 
<닥터 후> 인기의 정점에 있는 스페셜 <닥터의 날>은 모팻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만든 에피소드일 밖에 없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하나인 존 허트를 '전쟁의 닥터'로 캐스팅한 것부터 그 스케일을 그대로 보여준다. 뉴 시즌 2부터 4까지 활약한 10대 닥터(데이비드 테넌트 분)가 11대 닥터(맷 스미스 분)와 함께 출연하여 오랜 팬들을 감격시켰다.

불가능은 없다는 듯 기존 시리즈에서 금기시된 제 시간선과의 만남을 아무렇지 않게 극복해내는 모팻의 패기는 시리즈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은 소수 팬들에겐 반감을 샀음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에게 대단한 흥미를 안겼다.
 
이야기는 닥터에게 가장 치명적인 기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닥터의 종족, 타임로드라 불리는 이들의 행성이 오랜 적인 달렉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다. 시간의 전쟁이라 불리는 이 길고 지독한 전쟁이 그 끝자락에 다가선 순간이다. 이제까지 나왔던 모든 <닥터 후> 시리즈는 이 이후의 이야기로, 그 시작부터 달렉과 제 종족을 함께 말살한 타임로드족 마지막 생존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번 스페셜은 시청자들을 말로만 들었던 저 옛날의 이야기, 금기시되었던 닥터의 선택 이야기로 이끌고 들어간다.
 
<닥터 후>를 본 이라면 모두가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다. 닥터는 제가 살던 행성과 달렉을 한꺼번에 날려버린다. 우주를 지키기 위해 끝없이 전쟁을 되풀이하는 일족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제 종족 또한 멸절을 겪었고, 그 모두가 제 선택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그는 길고 긴 시간 동안 괴로워해야 했다. 존 허트가 연기한 전쟁의 닥터는 그보다 수백 년 씩은 더 산 10대 닥터와 11대 닥터보다 한참이나 늙은 외모로 그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
 
 <닥터 후: 닥터의 날> 스틸컷

<닥터 후: 닥터의 날> 스틸컷 ⓒ BBC

 
물리학 법칙 넘어 시청자에게 다가서는
 
<닥터의 날>은 전쟁의 닥터를 그의 미래인 두 닥터 앞에 데려다 놓는다. 다른 두 닥터는 겪지 못했던 과거가 전쟁의 닥터에겐 현재인 것이다. 하나의 시간선이 다른 시간선들과 만남으로써 닥터의 운명 또한 완전히 뒤바뀔 상황을, 그 엄청난 기회를 얻게 된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킵 손과 같은 이들이 이야기한 아인슈타인의 이론틀 안에서 바라보자면 시간여행을 하더라도 시간선은 단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는 분석은 모팻 앞에선 완전히 무시된다. 닥터와 그의 모험과 시간과 우주는 인간의 이해로는 닿을 수 없는 오묘함이 있다는 용감한 선택이 이 드라마에 전과는 완전히 다른 미래를 열어준다.
 
10대와 11대 닥터는 같은 기억을 갖고 있다. 그들은 제 행성과 적의 함대를 함께 파괴할 수 있는 최종무기를 사용했고, 그로부터 지독한 죄의식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아왔다. 한 종의 마지막 남은 생존자라는 인식 또한 저를 거듭 괴롭혔다. 이것이 이 시리즈의 정체성이었고 인간이 타임로드의 마지막 생존자를 경외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힘을 모아 제 과거이자 새 미래의 주인공인 전쟁의 닥터를 설득하려 한다. 새로운 가능성을 말하고 그 과정을 돕는다.
 
그 시청률이 보여주듯 <닥터의 날>은 수명이 다해가는 11대 닥터가 바통을 넘겨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캐릭터일 것을 짐작케 한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닥터는 몇 번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BBC는 <닥터 후>의 제작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언젠가 다시 <닥터의 날>이 거둔 화려한 순간이 재현되길 바란다. 저를 붙드는 제약들과 마주하여 '나는 그 이상을 원한다'고 칼을 휘두르는 이 용감한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그와 같은 영광이 그 앞에 다시 또 있으리라는 기대를 감추기가 어렵다.
 
 <닥터 후: 닥터의 날> 스틸컷

<닥터 후: 닥터의 날> 스틸컷 ⓒ BBC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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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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