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주변의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져서 내 삶이 다른 무엇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때가 있다. 내가 자주 굽는 삼겹살은 공장식 축산업체와 도축업체를 거쳐 가게까지 도달한 것이고, 거기엔 열악한 상황에서 근무하는 이주민 노동자의 피와 땀이, 축산폐수로 고통 받는 농장 인근 주민의 고통이, 때때로 땅 속에 묻히는 수많은 가축의 울부짖음이 배어든 것이란 사실을 잊을 때가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삶은 정말이지 많은 것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이를테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채 청춘의 가장 값진 시절을 바쳐야 하는 징집 장병들의 수고로움, 낙후된 지역에 들어선 전력생산시설이며 송전시설의 위험부담, 도시에서 배출한 폐기물을 대신 묻고 태우는 지역의 고충 같은 것들 말이다. 도시는 누리고 지방은 희생하는 이 체계를 나는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쓰고 시위현장을 지나치는 사람처럼 아무 잡음도 없다는 듯 누려왔던 일이다.
 
우리의 이 같은 삶이 어쩌면 영화 <매트릭스> 속 파란약을 삼킨 비겁한 이의 안락은 아닌가 의심될 때가 있다. 매달 몇 번 씩 삼겹살을 먹으면서도 돼지의 울음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다는 사실이, 분단된 휴전국에 살면서도 적병의 침공에 몸을 떨지 않는다는 사실이, 전기를 쓰면서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발전소와 송전탑의 문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민망과 창피를 넘어 비겁하게까지 느껴진다.
  
양지뜸 스틸컷

▲ 양지뜸 스틸컷 ⓒ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우리의 안락 뒤 짓밟히는 것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출품된 여러 작품들 가운데 <양지뜸>을 선택한 데도 이러한 이유가 자리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안락 뒤에 희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는 2017년 경북 성주군에 설치된 주한미군 사드(THAAD) 배치 이후를 다룬다. 사드 설치로 일상이 위협받게 된 소성리 주민들이 장비 반입을 막고 사드 철수를 외치며 저항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담았다. 주된 배경은 2018년부터 2019년까지로,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등 한반도 평화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시기다. 이 시기 소성리에 들어와 있던 김상패 감독은 마을 주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소소한 일상과 투쟁을 카메라로 기록한다.
 
감독 스스로 고백하듯 투철한 정치적 지향이나 확고한 목적의식 아래 만들어진 영화라고는 볼 수 없겠다. 다만 몇몇 운 좋은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충분한 시간과 애정을 들인 뒤에야 마주할 수 있는 귀한 장면을 담은 작품이 되었다.
 
영화 속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부녀회장을 맡은 대구댁 순분을 비롯하여, 봉정댁 금연과 봉정할배, 진기댁 상돌, 성주댁 길남, 수촌댁 경임 등 이 마을 할매할배들이다. 60대인 순분을 제외하고는 다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다. 평생을 농사짓고 나물 캐고 어우러져 살아온 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군대며 경찰을 마주하고 시위를 벌인다. 마을 바깥에서 이들을 돕겠다고 온 종교인과 활동가들이 있지만, 영화는 스스로 싸움을 선택한 마을 주민들 깊숙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양지뜸 스틸컷

▲ 양지뜸 스틸컷 ⓒ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가장 약하고 선한 자가 가장 가혹한 현실과 만나다
 
감독은 사드배치를 둘러싼 복잡한 논의를 애써 꺼내들지 않는다. 사드 설치를 하겠다는 미군과 정부의 입장이며 이를 둘러싼 정치인들의 발언은 단 한 마디도 소개되지 않는다. 이는 영화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봉정할배와 그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봉정댁, 그녀와 가까이 붙어 다니는 단짝 친구들, 매일 같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는 또 다른 할매들의 일상을 담는다. 그리고 그 일상 가운데 닥쳐온, 어느덧 일상이라 불러도 좋을 투쟁을 찍어내기 시작한다. 외부에서 온 활동가들이 마련한 자리에 할매들이 나서 마이크를 잡는다. 평온한 일상을 돌려달라는 마음이 어느덧 이들의 메마른 눈가에 눈물방울을 일으킨다. 평생을 살아온 마을에 갑자기 들어선 거대한 무기, 그 무기가 내뿜는 소음, 오가는 군대, 날아드는 헬리콥터, 산에 둘러쳐진 철조망 따위가 오래 이어진 소성리의 평온을 뒤흔든다.
 
영화를 보며 관객은 되묻게 된다. 어째서 소성리인가를, 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였길래 이들의 터전과 삶이 이런 난리를 겪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관객은 그 답을 알고 있다. 약하기 때문이다.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항하더라도 충분히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성리가 아니라 다른 어느 곳도 가능했다는 걸, 도시가 꺼리는 혐오시설이 들어선 수많은 지역이 그러했듯이 이번엔 소성리의 차례였다는 것을 말이다. 한국이 감당해야 할 것을 한국의 가장 약한 지역이 감당하는 것이 한국의 방식이 아니냐고,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영화는 시위에 나서는 이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평범한 이들, 우리 주변의 약하고 선한 자들임을 보여준다. 그 좋아하는 술도 충분히 살 수 없을 만큼 저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마을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지폐를 쥐어주는 봉정할배를 생각한다. 영화는 그가 카메라를 든 이에게 전에도 몇 번쯤 그러했듯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주던 순간을 잡는다. 돈을 받은 이는 어쩔 줄을 모르다 그저 봉정할배를 껴안는다. 그에게 봉정할배가 말한다.

이 나이까지 저는 곧게 살았다고 말이다. 할매들과 달리 영화 내내 사드며 미군이며 시위에 대해 한 마디 말도 않았던 그다. 그런 그가, 곧게 살았다는 그가 처음으로 감독의 집을 찾고, 또 카메라를 든 이에게, 무대에 오른 활동가들에게 지폐를 건네는 순간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사드가 파괴한 일상은 대체 어떤 인간들의 삶이었는가를 영화는 관객에게 묻고 있다.
 
양지뜸 스틸컷

▲ 양지뜸 스틸컷 ⓒ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누군가는 아쉬움을 표할지라도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함께한 이가 내게 이 영화의 아쉬움을 전했다. 사안을 바라보는 보다 정밀한 시선이 있었다면,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다면, 보다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이 영화를 마치 나의 것처럼 변호하였다. 그건 이 영화가 담아낸 귀한 순간들 때문이었다. 시간과 정성과 관심을 들이지 않고는 담을 수 없는, 잘 짜인 기획과 구성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것을 얼핏 허술하게도 보이는 이 다큐가 선명히 담고 있다고 나는 적극 이야기했던 것이다.
 
영화란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고, 이와 같은 귀한 순간은 분명 어떤 사람을 조금은 움직이리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사실 이 다큐는 많은 사람을 움직여야만 한다. <양지뜸> 이후 소성리는 영화에 그려진 것보다도 힘겹기 때문이다. 영화제를 찾은 부녀회장 순분은 이제 영화 속에 나온 할매할배 중 많은 수가 이 세상에 없다고 전했다. 영화를 찍을 땐 열심히 싸우면 1,2년 안에 사드가 뽑혀나갈 줄 알았지만 그 사이 사드는 늘어나고 사람들만 떠나갔다고 말했다.

나이든 할머니들은 전처럼 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은 끝내 투쟁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야기하는 순분씨조차 몸이 좋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였다. 곁에 있는 이들이 그녀의 상태를 몹시 우려하고 있었다.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100명 중 암환자 12명... 사드가 비추는 풍경
 
투쟁을 함께 한 강현욱 원불교 교무는 더욱 암담한 소식을 전했다. 사드 레이더가 바라보고 있는 김천 방향의 한 마을은 본래 100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지난 1년 동안 암환자가 12명이나 발생했고 이중 7명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간 우려됐던 전자파 방출 문제가 아닌가 싶지만, 송전탑 전자파 문제 등이 그러하듯 유해요소를 입증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이다. 입증하는데 필요한 자료는 미군과 국방부가 가지고 있으니 맨 주먹의 활동가와 주민들이 어찌 하겠는가 말이다.
 
강 교무는 영화가 촬영되던 시기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 때 조성됐던 동북아의 평화와 화해의 흐름엔 대가가 필요했다고 말이다. 미국과의 만남엔 선물이 필요했고, 그 선물이 소성리며 사드가 된 게 아니냐는 그의 말이 그저 억지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내가 사는 이 땅의 안락함이 또 한 번 깊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갈수록 막막해지는 듯한 소성리의 투쟁은, 그러나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직 적지 않은 할매들이 살아남았고, 이들은 오로지 제 손자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싸움에 나선다고 했다. 살 날이, 싸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눈물을 훔치면서도 다가오는 가을 소성리를 찾아 제가 만든 두부며 음식들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제가 가진 한 줌의 평온마저 잃어버린 이들이 또 한 줌의 무엇을 나누려는 마음이 너무나도 고와서 나는 이를 못 본 채 하고 사는 우리가 몹쓸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양지뜸>은 좋은 다큐일 테다. 좋은 다큐가 해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양지뜸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김상패 사드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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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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