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네가 자라서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되었을 거야. 수도사가 된다면 교황이 되겠지'라고 말씀하셨다. 대신에 나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피카소'가 되었다."

20세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입체주의의 창시자로 꼽히는 스페인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위상과 천재성을 상징하는 어록이다.
 
피카소의 작품은 회화, 판화, 조각, 도자기까지 총 15만 점에 이르며, 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걸작들 이면에는 이른바 '피카소의 뮤즈'로 불린 일곱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피카소는 새로운 연인을 만날 때마다 그녀를 자신의 뮤즈로 삼아 놀라운 예술세계를 창조하곤 했다.
 
9월 19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7회에서는 '위대한 작품 뒤 가려진 피카소의 두 얼굴' 편을 통하여 천재 예술가의 일대기와 그 이면에 가려진 은밀한 사생활을 조명했다. 우정아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피카소 아버지의 기행과 집착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피카소가 갓 태어났을 때 아기가 울지도 않고 축 처져있어서 사람들은 사산한 것으로 착각하여 그대로 버려질 뻔했다. 그런데 의사였던 삼촌이 피카소에게 담배연기를 내뿜자 그제서야 비로소 울기 시작하며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피카소의 부친 호세 루이스는 미술학교 교수였고, 피카소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됐다. 일찌감치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피카소를 혹독하게 교육시키는 대단히 엄한 스승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피카소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의 여러 기법들을 마스터한 미술 영재로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의 조기교육은 그림 기술만이 아니었다. 호세 루이스는 불과 13살의 피카소를 진짜 남자로 만들어준다며 성매매업소로 데려가 매춘부와 첫 성경험을 치르게 했다. 또한 비둘기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비둘기 사체에서 내장을 꺼내어 박제하거나 다리를 잘라 다른 곳에 붙이는 잔혹한 행위를 지시하기도 했다. 훗날에도 성인이 된 피카소의 인생을 관통하게 되는 여성과 사랑에 대한 잘못된 욕망을 심어준 것도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는 평가다.
 
화가로는 그리 대성하지 못했던 호세 루이스는, 대부분의 극성부모들이 그러하듯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을 통하여 대신 이루려는 집착이 강했다. 그는 아들에게 사실적이고 교훈적인 아카데미 화풍의 그림만을 그릴 것을 끊임없이 강요했다. 15세의 피카소가 지역 미술전에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내자 더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본인의 팔레트와 붓을 아들 피카소에게 물려주면서 "네가 나의 꿈을 이루어다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언제까지 아버지의 아바타로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원했고, 아버지의 요구로 입학했던 스페인 최고의 명문학교인 산페르난도 왕립미술학교를 2년 만에 중퇴했다.

이에 호세 루이스는 크게 분노했고, 부자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다. 호세 루이스는 평생 피카소의 그림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아들과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집을 나온 피카소는 이때부터 아버지의 성 루이스를 버리고 어머니의 성이었던 피카소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을 선언했다.
 
자립한 피카소는 18세였던 1899년 스페인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피카소가 제시한 표현적인 화풍은 미술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인 1900년에는 파리 세계박람회까지 출품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피카소는 화가인 카사헤마스-프랑스 여성 제르맹 가르갈로와 절친한 사이가 되어 셋이 자주 함께 어울렸다. 그런데 제르맹에 깊이 반해버린 카사헤마스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실연의 상처를 이기지 못한 카사헤마스는 결국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피카소와 제르맹은 절친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는 제르맹을 위로해주다가 그녀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후로 피카소는 몇 년간이나 카사헤마스의 사망이 불러온 정신적 충격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화풍 역시 푸른색으로 진지하고 우울한 정서를 띠게 된다. 이 시기는 피카소의 작품 연대기에서 '청색시대(1901-1904)'로 불리우며 그의 인생 전반에서도 가장 암울했던 시절로 불린다.
 
여성편력의 시작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904년 당시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살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에 정착한 피카소는, 미술 인생의 전환점이자 장대한 여성편력의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된다. 바로 피카소의 첫 번째 뮤즈로 불리우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된 것이다.
 
페르낭드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도망쳐 파리에 정착했고, 화가들의 모델로 활동하다가 우연히 피카소를 만나게 됐다.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첫 인상에 대하여 "첫 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인 데는 없었지만, 이상스럽도록 고집스러운 표정 때문에 눈길이 갔다. 그에게서 느낀 내적 열기와 눈의 광채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일종의 자석이었다"(PICASSO et ses amis 중)라고 회상했다.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고, 페르낭드와의 만남으로 정신적 안정을 찾은 피카소는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며 화풍과 색감도 밝게 변했다. <파이프를 든 소년> <곡예사 가족> <라팽 아질에서> 등의 밝은 색감의 작품들이 부각되는 이 시기를 이른바 장및빛 시대(1904-1906)라고 한다.
 
피카소는 페르낭드와 함께 스페인 고솔로 여행을 떠났다가 정제된 유럽 미술과는 다른 원시 미술의 매력에 눈에 뜨게 된다. 1907년에 발표한 <아비뇽의 처녀들>은 피카소의 대표작이자 '20세기 미술의 시작'으로 불리우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한 평론가는 "모든 사물이 정육면체 큐브 조각으로 깨져있는 것 같다"는 평가했고, 이로 인하여 '큐비즘(입체주의, 대상을 해체-분석하여 추상적인 형태로 재조합하는 표현 양식)'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되면서 새로운 화풍의 시작점이 된다.
 
하지만 피카소와 페르낭드의 행복한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동거 중 맞바람을 피우며 갈등을 빚었다. 피카소는 페르낭드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집에 감금하기도 했다.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집착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친구인 에바 구엘을 소개시켜줬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던 피카소와 에바 모두 애인이 있었으나 결별하면서 두 사람은 결국 새로운 연인이 됐다.
 
페르낭드와는 달리 가정적인 성격의 에바는 묵묵히 피카소를 잘 챙겼고, 이 무렵의 피카소는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입체주의 화풍이 더 깊어진 시기로 꼽힌다 <기타> <누드>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 등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 속에는 에바의 영향이 강하게 묻어난다는 평가다.
 
하지만 1915년 12월, 에바는 암에 걸려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충격적이게도 피카소는 에바의 병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녀를 버리고 새로운 뮤즈를 찾아나섰다.
 
피카소는 에바와 헤어지고 이듬해 10세 연하의 올가 코클로바라는 러시아 귀족 출신 발레리나를 만나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1918년 7월 37세의 피카소는 올가와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런데 올가는 피카소의 입체주의 화풍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을 그릴 때는 이전의 여인들과는 달리 사실적인 고전주의 화풍으로 그려줄 것을 요구했다. 올가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상류사회에 진출하게 되었고, 고전주의로 회귀한 화풍에서 옷차림도 상류층처럼 고상하게 변했다.
 
1921년 피카소는 아들 파올로를 얻었고, 이때부터 아기의 초상화나 모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잇달아 선보였다. <엄마와 아이> 등의 작품에서 피카소는 고전주의 방식을 넘어 인물을 과감하게 과장해서 그리는 방식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가의 과도한 상류사회 집착과 간섭에 질린 피카소는 점점 그녀에 대한 애정이 식었고 갈등이 깊어졌다. 결혼 9년째였던 1927년 46세의 피카소는 파리에서 17세의 금발소녀 마리 테레즈 월터를 만나 한눈에 반한다.
 
피카소는 첫 만남에서 "당신은 흥미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초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나는 피카소입니다"라고 직진고백을 했지만 마리 테레즈는 정작 피카소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굴욕을 당한 피카소는 마리를 서점으로 데려가 자신에 관한 책을 보여줬고 마리는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허락했다.
 
"네가 나를 살렸고 내 삶의 구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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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피카소와 마리는 모델과 화가로 만나 29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피카소는 올가와 두 집 살림을 즐기면서 사생아인 딸 마야를 얻었다. 반면 올가는 피카소의 바람기 때문에 정신질환까지 걸릴 만큼 고통을 받았다.
 
당시 마리에게 받은 영감으로 피카소의 화풍도 한결 자유분방해졌다. 이 시기 작품인 <칼을 든 여인>에서 모델이 된 아내 올가를 절규하며 남성을 칼로 찌르는 괴물같은 모습으로 풍자했다면, 마리를 모델로 한 <꿈>에서는 화사하고 생동감있는 모습으로 묘사하며 애정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피카소는 마리에게 "네가 나를 살렸고 내 삶의 구원자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마리에게 빠진 피카소는 올가와 이혼하려고 했고 충격받은 아내 앞에서 전날 함께 들은 오페라를 큰 소리로 흥얼거리며 조롱하는 잔인한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이 식은 아내에게 재산의 절반을 내주기가 아까웠던 피카소는 올가와의 이혼소송을 취소하고 대신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서 별거를 선택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도 피카소의 종착역은 아니었다. 딸 마야가 태어난 지 1년도 안 되어 55세의 피카소는 카페에서 손을 자해하던 도라 마르라는 여성을 만나 한눈에 반한다.
 
사진작가인 도라는 상냥하고 수동적이던 마리와는 정반대로 기가 세고 도발적인 성향이었다. 도라는 당시 프랑스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초현실주의(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사조) 성향의 사진을 즐겨 찍었다. 두 사람은 27살의 나이차에도 예술적 영감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당시 피카소는 아내 올가와는 별거중, 마리와는 동거중이었으나 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은 채 도라와의 새로운 사랑을 이어갔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고 이듬해인 1937년 4월 26일에는 나치의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대거 사망하는 '게르니카 참사'가 발생한다. 고향의 비극에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6주 만에 <게르니카>를 완성하며 전쟁의 참상과 공포를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 세계에 게르니카의 비극을 알렸다. 사진처럼 흑백의 대비효과를 통하여 비극성을 극대화한 연출은, 연인인 도라 마르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이 작품에는 피카소와 도라-마리간의 삼각관계도 묘사되어있다. 야사에는 피카소의 바람기를 눈치챈 마리가 삼자대면을 통하여 분명한 관계정리를 요구했고, 난감해진 피카소가 "둘이 싸워서 이긴 사람에게 가겠다"는 황당한 답변을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피카소는 결국 도라를 선택하며 마리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환승이별을 단행했다.
 
도라 역시 피카소의 그칠 줄 모르는 바람기 때문에 고통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피카소는 자신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도라를 보고서도 모른 체했고 오히려 이를 소재로 <우는 여자>라는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눈과 옆을 향하고 있는 입과 턱은, 악에 받쳐서 울고있는 도라의 모습을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도라가 피카소를 떠나지 못한 것은 인간적인 면모보다 예술가로서의 천재성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도라도 올가처럼 피카소의 바람기 때문에 정신질환까지 걸렸고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당신은 위대한 예술가일지 모르지만 인간쓰레기야"라는 독설을 날렸다고 한다.
 
처음으로 피카소를 먼저 떠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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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와 헤어진 후 62세의 피카소는 이번엔 40살 연하의 법대생이었던 지적인 화가 질로를 만난다. 피카소는 아직 도라와 사귀고 있을 당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질로에게 체리를 선물하며 처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질로는 "아버지나 다른 남자들과는 말이 안 통하는데 나보다 3배나 연상인 당신과 대화가 통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질로와 만나면서 피카소의 화풍도 또다시 변했다. 1946년 발표한 <여인, 꽃>에서는 녹색 잎사귀와 조명 등으로 표현한 머리를 통하여 지적이고 우안한 질로의 매력을 묘사하고 있다. 피카소는 질로에게 애정을 쏟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얻었다. 이전의 연인들과 달리 피카소는 질로를 여왕처럼 모시며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올가는 질로를 질투하여 몇 년간 스토킹을 하며 괴롭혔다고 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런 질로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그 무렵 피카소는 또다른 바람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자신도 피카소에게는 스쳐지나가는 여자 중 하나였음을 깨달은 질로는 "그가 사랑한 건 여자가 아니라 미술뿐"이라고 일갈하며 역대 뮤즈 중 처음으로 피카소에게 먼저 이별을 통보한다. 피카소는 협박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질로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하여 집착했다. 하지만 질로는 "나는 내 사랑의 노예이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야"라고 일침을 날리며 두 아이를 데리고 피카소를 떠나버렸다.
 
피카소는 찌질하게도 결별 후에도 미술계에서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질로의 화가 인생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질로는 굴하지 않고 유럽을 떠나 미국에서 화가의 길을 이어갔다.
 
질로는 피카소와 헤어진 지 11년 후 회고록(<피카소와 함께한 삶>, 1964)을 출간하며 그의 문란한 사생활과 비열한 면모를 폭로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회고록은 피카소만이 아니라 파리 예술계의 어두운 이면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17개국 언어로 출판될 만큼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회고록에 따르면 피카소는 질로에게 "나는 악마이기 때문에 당신을 내 노예로 만들고 낙인을 찍을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출판을 막기 위하여 소송을 벌였고 법정에게 질로를 맹공격했으나 결국 패소했다. 화가 난 피카소는 질로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이와의 관계도 단절했다. 하지만 질로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하여 부자가 되었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재혼에 성공했다. 또한 피카소 사후를 대비하여 사생아가 된 자녀들을 다시 호적에 올리는 소송을 벌이며 피카소에게 복수했다.

올가와 질로에게 연이어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던 피카소는 72세의 노년이 되어 마지막 뮤즈인 자클린 로크를 만난다. 도자기 공장에서 만난 26세의 자클린은 피카소와는 46세 차이였고 딸을 가진 이혼녀였다. 피카소는 6개월간 자클린에게 장미를 선물하며 적극적으로 구애했고, 자클린의 딸을 양녀로 입적하기도 했다. 정신질환을 앓던 조강지처 올가와 사별하게 되면서 자유의 몸이 된 피카소는 1961년 3월 자클린과 결혼했다.
 
자클린은 피카소를 "나의 태양, 나의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고 한다. 말년의 피카소에게 자클린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터키 의상을 입은 자클린> <개를 안고 있는 여자> 등 피카소의 뮤즈 중에서도 가장 많은 4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등 자신의 예술세계를 총망라하여 다양하게 자클린을 표현했다. 자클린의 존재로 안정감을 되찾은 피카소는 노년까지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프랑스 무쟁의 별장에서 9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비록 사생활과 인성 면에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예술가의 사망에 전 세계가 애도를 보냈다. 피카소가 남긴 재산은 약 5억 프랑(약 1조 4000억 원)에 이르렀다. 피카소가 생전에 유산 상속에 대한 유서를 남기지 않아 법적 공방이 예고되었지만, 아내 자클린이 유산을 공정하게 배분하며 논란의 소지를 차단했다.
 
하지만 피카소의 여인들 중 자클린과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 사후 오랫동안 떠나간 그를 그리워하다가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피카소와 만난 여인들은 그로 인하여 정신질환에 걸리거나, 버림받는 등 대부분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피카소와 결별한 후에도 스스로 자립하여 행복한 삶을 되찾은 것은 프랑수아즈 질로가 유일하다.
 
"창조의 모든 행위는 파괴에서 시작된다." 피카소가 남긴 예술관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사생활을 알고나면 뭔가 미묘하게 다가온다. 피카소는 흔히 천재 예술가로만 기억되지만, 그가 예술혼을 불태우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는 데 7명이나 되는 뮤즈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벌세계 피카소 입체주의 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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