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동 김환경스틸컷
JIFF
시민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들은 죄다 노인들뿐이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들어오는 이는 없고 남은 건 남아 있는 이들 뿐이다. 반세기 넘게 나이든 아파트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사람들, 추억이 있는 이들, 나갈 곳이 없는 이들, 각자의 사연으로 이곳에 남아 있는 이들이다.
얼마 되지 않는 그들이지만 서로가 공유하는 추억이 있다. 1970년대 이곳에서 일었던 노동운동, 그중에서도 들불야학의 중심지가 바로 여기 시민아파트였다는 것이다. 당시 공단이던 광천동 일대에 모여든 도시빈민들에게 교육을 하자는 것이 들불야학의 모태였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들이 광천공단 청년 노동자들을 모아 교육을 진행한다. 도시빈민들이 모여 살던 시민아파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에 김영철이 있었다.
김영철은 1970년대 시민아파트 사람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던 이들이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며 더럽고 냄새나던 공간을 그가 앞장서 뒤바꿨다고 전한다. 아파트 현관에 종을 매달고 때가 되면 종을 쳐 아이들을 모아 청소를 시켰다. 들불야학 강학들과 가까이 지내며 이 아파트를 근거지 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술과 음식을 사서 마을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도 모두에게 행복한 기억을 안겼다.
시민아파트 주민들은 청년 김환경 앞에서 오래 전 떠나간 김영철을 떠올린다. 그가 살았을 적 이뤘던 일들, 함께 나누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사람냄새 나는 추억들, 못함에서 나아짐으로 변화하던 모습들, 그 안에 깃든 애정과 자긍심들, 이웃끼리 부대끼며 겪어낸 것들을, 온갖 좋은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날 끝나버렸음을 영화는 마침내 이야기한다.
1980년 5월의 광주... 누가 그들을 망쳤는가
1980년 5월의 광주, 김영철은 도청에 있었다. 그는 들불야학 강학들, 열사들과 함께 도청을 지키기로 결의한다. 패배를, 죽음을 알면서도 역사가 마침내 저들을 기억해주리라는 희망을 안고 그 안에 들어가길 선택한다. 아내를 밖에 남겨둔 채 들어간 김영철은 아끼던 동생들을 모조리 잃고 계엄군에 붙들려 끌려나온다. 상무대 영창에서부터 겪은 갖은 고문으로 뇌신경 손상을 입었고, 7년의 징역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후유증으로 숨진다.
철거를 두고 온갖 잡음이 이는 이 낙후된 아파트에서 1980년 5월의 기억까지가 한달음에 이뤄진다. 청년 김환경은 목표한 바 그대로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광주의 오늘 안에 담긴 잊혀선 안 되는 기억에 이른다.
누군가는 말한다. 재개발에 낭만이 무슨 말이냐고. 조합원이 따로 있는데 개발사업을 가로막는 외부의 목소리는 무엇이냐고 말이다. 들불야학과 그 근거지인 시민아파트를 보존하자는 목소리는 그저 누구의 정당한 재산권 행사를 막는 외침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논리 너머로 그저 사라져선 안 되는 목소리가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빈민들을 가르쳐 의식을 일깨우고 주변을 치우고 서로를 보듬도록 했던 이야기들이 말이다. 어쩌면 그 목소리가 김환경을 이제는 사는 이 얼마 없는 낙후되고 불편한 아파트로 불러온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J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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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