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의 순간> 스틸컷
영화로운형제
03.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다시 상기해 보자. 파도가 치는 갯바위 위에 홀로 서 있던 영의 뒷모습을 정후가 자신의 카메라로 몰래 촬영하면서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셔터 소리에 의해 영이 그 사실을 알게 되지만, 사실 정후의 입장에서도 그 촬영은 '몰래'라는 단어보다 '홀린 듯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어울리는 경우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이 기억하는 엄마라는 존재의 마지막과 닮아 있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 대해 영은 처음에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다가와 사진을 지워달라고 하지만 뒷모습 한 장면만 남기게 해 달라는 정후의 부탁을 못 이기는 척 들어준다. 다음날에 자신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부탁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 있는 등대들 배경으로 찍어주세요. 등대들 전부."
이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두 사람의 심리와 과거를 의미하는 메타포를 곳곳에 설치하기 시작한다. 영이 등대에 집착하는 이유는 역시 자신이 부유하고 표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리고 높은 파도에 길을 잃은 배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히는 존재가 자신에게도 필요했으니까. 앞서 그녀에게 사진이란 현재를 붙잡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을 모델로 삼고 싶다는 정후의 부탁을, 어쩌면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을 영이 쉽게 믿게 되는 것 역시 정후의 사진을 통해 자신의 현재를 붙잡고 싶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04.
갯바위와 영의 뒷모습, 그리고 항상 같은 드레스만 고집하는 정후의 태도는 엄마의 기억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같은 가족사로 이어진다. 아버지에 의해 사진을 처음 접했고 배운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의 직업적 성공으로 인해 많은 것을 누렸음에도 그의 존재를 정후가 용서할 수 없는 데에는 역시 엄마가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성공하기 위해 가족을 방치한 대상이자 엄마의 죽음과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인물로 기억하는데, 이는 자신이 사진을 바라보는 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과거를 재생하는 수단으로 사진을 대하는 태도가 영과 맞서는 지점이라면, 철저한 통제와 의도에 의해서만 아름다움이 촬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연에 의해 좋은 사진이 완성될 수 있다는 아버지의 철학에 맞서는 부분이다. 실제로 정후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나 의도가 아니면 촬영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모델이 되는 대상의 의상까지도 매번 같은 드레스로만 제한하고자 한다. 영화의 제일 처음에서 등장했던 고객이 남자가 입으라고 건넨 옷을 보고 박차듯 자리를 떠난 이유를 이제는 알 것도 같다. SNS 등을 통해 이때까지 그가 촬영해 왔던 샘플 속 다른 인물들과 같은 옷이 그녀에게도 주어졌을 테니까.
문제는 정후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균열이 바로 이 지점, 자신이 홀린 듯이 빠져있는 사진 속의 대상과 그 프레임 바깥에 실재하는 인물의 거리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의 처음 타이틀이었던 유령 이미지의 개념이 활용된다.) 실제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공간은 사진 속 프레임의 공간과 달리 모든 것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통제할 수 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가 모두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진 속의 장면들조차 어떤 우연이 개입되어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결국 사진이라는 것이 빛의 예술이고 그 빛을 조절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일 테지만, 자연의 섭리를 인간이 완벽히 제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