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남남'으로 대하는 모녀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남남>의 포스터.
ENA
우리는 흔히 가족을 '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 여성에게 가혹한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서로 더 깊이 의존하는 엄마와 딸이라면 서로를 마치 한몸처럼 여기고, 상대방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엄마와 딸은 둘 다 자기 자신의 욕구보다는 상대방의 욕구에 더 신경쓰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남남>의 은미는 딸 진희를 '남'으로 대한다. 5회 경찰인 진희는 낮 동안 힘들게 일하고 와 물리치료사인 은미에게 "어깨를 좀 만져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열심히 걸그룹의 댄스를 따라하고 있던 은미는 무심한 듯 이렇게 말한다.
"병원에서도 남의 몸 만지는 거 기 빨리는데 집에 와서도 남의 몸 만져야 되니? 싫어."
이에 딸 진희는 "내가 남이야?"라고 항변하지만, 은미는 다시 "그럼 내 몸뚱어리야? 라고 반문한다.
이렇듯 은미는 딸을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바라본다. 딸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구에 당당하고, 딸에게 남자관계든 성적 욕구든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때문인지 자신이 홀로 힘들게 키웠으니 너 역시 내게 잘해야 한다는 그 흔한 엄마의 마음이 없다. 조금은 철없어 보이기도 하는 은미의 이런 모습은 실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려는 태도라 볼 수 있다.
은미는 조언을 할 때도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9회 "인생의 설명서가 필요하다"는 진희의 말에 "그런 건 필요없다"고 조언하지만, "그래도 설명서는 필요해"라고 진희가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땐 그저 쿨하게 받아들인다. 조언은 하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희를 조련하지는 않는다.
이런 엄마의 태도 덕에 딸 진희 역시 엄마를 '나와는 다른 한 사람'으로 대한다. 1회에 진희는 은미의 자위 모습을 목격하는데 이때 진희는 잠시 놀라긴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엄마의 욕구로 수용해준다. 그리고 함께 자위 용품을 쇼핑하러 간다. 둘이 서로를 독립된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있음이 잘 드러난 부분이었다.
또한, 늘 솔직하고 당당한 은미의 모습은 진희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결핍이라 생각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진희는 친구든 직장동료든 누구에게든 자신이 모녀가정임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동료들이 이를 알게 되었을 때도 "여고생에게서 태어난 딸 처음 봐 어때?"(9회) 반문하는 등 스스로에게 당당하다.
'가족 각본'에서의 해방
이렇게 서로를 '남남'으로 대하는 이들 모녀의 태도는 오래된 '가족 각본'마저 깨부순다. 김지혜 교수가 최근작 <가족 각본>에서 이야기했듯,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이성애에 기반한 결혼이 출산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각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때문에 결혼관계 밖의 출생이 차별받고, 비혼가정, 한부모 가정, 성소수자 가정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법은 '혈육'을 가족의 조건으로 걸고 있어 혈연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서로를 돕고 있는 다양한 가족들을 배척한다.
그런데 이 모녀는 당당히 '혈육'을 가족의 조건에서 배제한다. 진희의 생부인 진홍(안재욱)이 나타났을 때 은미는 둘의 관계를 철저히 딸 진희와는 분리시킨다. 은미는 자신의 의지로 낳고 키운 딸 진희에 대해 처음부터 진홍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내 딸 오빠랑 상관없어."
진희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등장에 잠시 혼란스러워하지만, 진홍에 대해 "엄마의 현재 애인"으로 여기기로 마음먹고 실제로 그렇게 대한다. 물론 조금 껄끄럽고 어색한 감정들은 있지만 진희는 엄마와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9회 혈육으로서는 '고모'인 엄마 친구 지은을 '이모'라고 부르는 모습은 이들이 '가족 각본'에서 벗어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은미 역시 진홍과 지내면서 조금 더 안전하고 행복한 일상을 영위한다. 혈육에 연연한 '가족 각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들 모녀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지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