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편집자말]
'가정폭력을 겪던 한 여고생이 임신을 한다. 남자 친구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떠나버린다. 여고생은 홀로 딸을 낳고 아이를 키운다. 그러다 딸이 성인이 된 어느 날 갑작스레 생부가 나타난다. 그리고 벌어지는 일은…….'
 
드라마 <남남>은 이런 설정에서 시작한다. 꽤나 익숙하지만, 무겁고 슬픈 '신파'의 느낌이 강한 스토리다. 도무지 코미디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공식 장르는 '코미디'다. 정말로 엄마 은미(전혜진)와 딸 진희(수영)는 매번 티격태격하는데 그 일상이 꽤 재미있다. 때로는 따뜻한 느낌도 든다. 이들 모녀는 30년 만에 '그 놈'이 나타났는데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지켜낸다. 이런 엄마와 딸을 바라보다 보면 어딘지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전형적인 '신파' 설정 속에서도 어떻게 이 모녀는 이토록 괜찮을 수 있었던 걸까. 이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탐구해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라는 전제
  
 서로를 '남남'으로 대하는 모녀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남남>의 포스터.
서로를 '남남'으로 대하는 모녀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남남>의 포스터.ENA
 
우리는 흔히 가족을 '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 여성에게 가혹한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서로 더 깊이 의존하는 엄마와 딸이라면 서로를 마치 한몸처럼 여기고, 상대방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엄마와 딸은 둘 다 자기 자신의 욕구보다는 상대방의 욕구에 더 신경쓰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남남>의 은미는 딸 진희를 '남'으로 대한다. 5회 경찰인 진희는 낮 동안 힘들게 일하고 와 물리치료사인 은미에게 "어깨를 좀 만져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열심히 걸그룹의 댄스를 따라하고 있던 은미는 무심한 듯 이렇게 말한다.

"병원에서도 남의 몸 만지는 거 기 빨리는데 집에 와서도 남의 몸 만져야 되니? 싫어."

이에 딸 진희는 "내가 남이야?"라고 항변하지만, 은미는 다시 "그럼 내 몸뚱어리야? 라고 반문한다.
 
이렇듯 은미는 딸을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바라본다. 딸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구에 당당하고, 딸에게 남자관계든 성적 욕구든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때문인지 자신이 홀로 힘들게 키웠으니 너 역시 내게 잘해야 한다는 그 흔한 엄마의 마음이 없다. 조금은 철없어 보이기도 하는 은미의 이런 모습은 실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려는 태도라 볼 수 있다.
 
은미는 조언을 할 때도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9회 "인생의 설명서가 필요하다"는 진희의 말에 "그런 건 필요없다"고 조언하지만, "그래도 설명서는 필요해"라고 진희가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땐 그저 쿨하게 받아들인다. 조언은 하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희를 조련하지는 않는다.
 
이런 엄마의 태도 덕에 딸 진희 역시 엄마를 '나와는 다른 한 사람'으로 대한다. 1회에 진희는 은미의 자위 모습을 목격하는데 이때 진희는 잠시 놀라긴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엄마의 욕구로 수용해준다. 그리고 함께 자위 용품을 쇼핑하러 간다. 둘이 서로를 독립된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있음이 잘 드러난 부분이었다.
 
또한, 늘 솔직하고 당당한 은미의 모습은 진희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결핍이라 생각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진희는 친구든 직장동료든 누구에게든 자신이 모녀가정임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동료들이 이를 알게 되었을 때도 "여고생에게서 태어난 딸 처음 봐 어때?"(9회) 반문하는 등 스스로에게 당당하다.
 
'가족 각본'에서의 해방
 
이렇게 서로를 '남남'으로 대하는 이들 모녀의 태도는 오래된 '가족 각본'마저 깨부순다. 김지혜 교수가 최근작 <가족 각본>에서 이야기했듯,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이성애에 기반한 결혼이 출산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각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때문에 결혼관계 밖의 출생이 차별받고, 비혼가정, 한부모 가정, 성소수자 가정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법은 '혈육'을 가족의 조건으로 걸고 있어 혈연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서로를 돕고 있는 다양한 가족들을 배척한다.
 
그런데 이 모녀는 당당히 '혈육'을 가족의 조건에서 배제한다. 진희의 생부인 진홍(안재욱)이 나타났을 때 은미는 둘의 관계를 철저히 딸 진희와는 분리시킨다. 은미는 자신의 의지로 낳고 키운 딸 진희에 대해 처음부터 진홍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내 딸 오빠랑 상관없어."
 
진희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등장에 잠시 혼란스러워하지만, 진홍에 대해 "엄마의 현재 애인"으로 여기기로 마음먹고 실제로 그렇게 대한다. 물론 조금 껄끄럽고 어색한 감정들은 있지만 진희는 엄마와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9회 혈육으로서는 '고모'인 엄마 친구 지은을 '이모'라고 부르는 모습은 이들이 '가족 각본'에서 벗어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은미 역시 진홍과 지내면서 조금 더 안전하고 행복한 일상을 영위한다. 혈육에 연연한 '가족 각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들 모녀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지킬 수 있었다.
 
 은미와 진희는 서로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싸우기도 한다.
은미와 진희는 서로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싸우기도 한다. ENA
 
'남남'이지만 연결되고 서로 돕는
 
하지만, 이렇게 서로를 분리하면서도 이들은 충분히 연결된다. 엄마 은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모성을 드러낸다. 1회 시작 지점에서 아동 학대범을 한눈에 알아본 은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애미가 애는 나몰라라 하고 유괴범부터 쫓아?" 그리곤 7회 자신이 위험에 노출돼 경찰에 갔을 땐 딸 대신 진홍을 부른다. 그리고 진희를 부르는 게 맞지 않았냐는 진홍의 말에 이렇게 답한다. "그 위험한 데를 내 딸을 어떻게 불러?"
 
6회에는 어린 진희를 엄마의 앞길을 막는 '금붕어 똥'이라 칭하는 이웃들을 은미가 혼내주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8회에는 청소년이 된 진희가 "딸에게 맨날 남자 이야기만 하고 무슨 엄마가 이래?"라고 한마디 하자 길었던 머리를 싹뚝 자른 사연도 나온다. 이는 비록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은미이지만, 한편으론 진희를 염두에 두고 지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이처럼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것과 모성을 실천하는 것은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
 
진희 역시 은미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항상 기억한다. 그리고 이런 엄마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경찰이 된다(7회). 진희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엄마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미와 진희는 때로 과할 만큼 서로의 감정들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갈등과 '막말'들조차 둘 사이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처럼 날것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서로를 믿고 안전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아가 이들 모녀는 다른 이들과도 연결된다. 은미는 자신을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구해준 친구 미정(김은혜)과 그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진희를 키우는데 이는 마치 여성들의 연대처럼 느껴졌다. 혈육은 아니지만 서로를 존중하면서 함께하는 모습이 "진짜 제대로 된 가족"(10회, 은미)이었다. 또한, 은미와 진희는 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구하고, 임신한 여고생을 돕는 등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이는 이들이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타인과 연결되는 모습이었다.
 
 30년간 모른 채 지낸 생부 진홍을 진희는 철저히 '엄마의 남자친구'로만 대한다.
30년간 모른 채 지낸 생부 진홍을 진희는 철저히 '엄마의 남자친구'로만 대한다. ENA
 
"가족은 원래 헤비한 거야. 책임지고 부담스럽고, 그치만 든든할 땐 엄청 좋고."
 
7회 진희의 절친 태경(서예화)는 생부를 만났음에도 '나와 상관없다'고 가볍게 생각하는 진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정말 가족은 꼭 서로를 책임지고 헤비해야만 하는 걸까. 가족이라는 이유로 나와 같기를 강요하지도, 혈육이라는 이유로 서로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라 요구하지도 않지만, 서로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면서 각자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책임지는 진희-은미 모녀의 모습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헤비하지는 않지만, 든든해 보이지 않는가.
 
은미-진희 모녀를 보면서 가족각본에서 벗어나 서로를 '남남'으로 대하면서도 연결되는 이들의 모습이 어쩌면 더 진정한 가족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족 각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고 있을, 혹은 빠져나왔지만 어딘지 불편한 시선에 힘들어하고 있을 현실 속의 수많은 은미와 진희를 응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남남 모성 가족각본 전혜진 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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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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