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여행하는 작품이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 언제일까. 많은 의견이 나올 수 있겠으나 빠지지 않는 한 가지는 과거의 인물, 그중에서도 매력적인 누구를 만나는 장면일 테다.
 
많은 이들이 저물어가는 감독이라 평가했던 우디 앨런을 다시 돌아보게 한 영화가 있다. 다름아닌 <미드나잇 인 파리>다. 오웬 윌슨과 마리옹 꼬띠아르, 레이첼 맥아담스, 애드리언 브로디 등 당대 최고라 할 배우들이 두루 출연한 이 영화는 자정이 되면 오는 마차를 타고 한 세기 전으로 떠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가 많은 관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부부, 거트루드 스타인, 콜 포터, 앙리 마티즈, T. S. 앨리엇, 살바도르 달리, 툴루즈 로트렉, 에드가 드가, 루이스 부뉴엘, 폴 고갱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예술가들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으로 스크린 위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술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이들 작가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영화 속 주인공들과 대면하는 순간은 낯설면서도 짜릿한, 영화이지만 영화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닥터 후 포스터

▲ 닥터 후 포스터 ⓒ BBC

 
과거로 돌아가 만나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TV시리즈이자 한국에서도 OTT 등을 통해 꾸준한 관심을 받는 <닥터 후> 또한 이 같은 장치를 자주 사용한다. 영국을 대표하는 콘텐츠답게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스 같은 이들을 작품 가운데 불러와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이는 자연히 작품을 보는 이들을 자극하여, 저들이 이 같은 작가를 보유한 문화적 강국이란 자긍심을 일깨우는 요소로 활용된다.
 
완성도가 각별히 뛰어나 버릴 에피소드가 없다는 평가를 듣는 뉴 시즌 4번째 시리즈에서도 이와 같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유니콘과 말벌'이라 이름 붙은 7번째 에피소드로, 주인공인 닥터(데이비드 테넌트 분)와 도나(캐서린 테이트 분)가 1926년 영국으로 떠나 겪는 문제를 그린 작품이다.
 
닥터와 도나가 1926년의 영국에서 만난 이는 다름 아닌 애거서 크리스티다. 오늘날 추리문학의 제일가는 거장으로 꼽히는 유명 작가이지만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명성은 갖지 못했던 그녀다. 여러 편의 소설을 완성한 주목받는 작가이긴 해도 아직은 제 작품에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닥터 후 스틸컷

▲ 닥터 후 스틸컷 ⓒ BBC

 
이 드라마가 위대한 작가를 존중하는 법
 
이야기는 크리스티를 포함해 여러 사람이 찾은 한 저택에서의 파티로부터 시작된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닥터와 도나 또한 이 파티에 참여한다. 그런데 웬걸, 시작부터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며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간다. 크리스티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답게 첫 사건은 역시 살인이다. 한 참석자가 서재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고 고립된 저택에 있는 모두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그로부터 닥터는 추리계의 전문가인 크리스티와 함께 범인을 색출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야기는 애거사 크리스티에게 실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녀가 1926년 12월 돌연 실종되어 11일 만에 어느 호텔에서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된 유명한 실화를 조금은 각색하여 내놓은 것이다. 크리스티가 실종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는 그녀가 끝내 입을 열지 않음으로써 오랫동안 세간의 화제로 남았는데, 영국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닥터 후> 시리즈가 이를 다룬 건 여러모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에피소드는 마치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그러하듯 고립된 저택에서 용의자를 추려가며 살인의 배후를 쫓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통상 모험적인 SF 장르물에 충실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추리물의 방법론을 따랐다는 점이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는 SF물이자 가벼운 코미디적 성격을 지닌 <닥터 후> 본래의 정체성과도 제법 잘 어우러지고, 영국인이 각별히 좋아하는 작가를 작품 가운데 되살려 낭만성을 더하는 요소로도 기능한다.
 
닥터 후 스틸컷

▲ 닥터 후 스틸컷 ⓒ BBC

 
드라마 속 작가들로부터 문화적 자긍심을 읽다
 
작품은 오늘날의 영광을 알지 못하는 크리스티의 모습을 거듭하여 비춘다. 제 성공을 끝내 알지 못하고 죽은 많은 이들, 빈센트 반 고흐나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등과 같이 생전 그 같은 성취를 거둘 것임을 알지 못하는 크리스티에 대하여 도나는 거듭 그녀가 제 성공을 알았다면 어떠할까를 생각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닥터는 누구도 제가 받는 평가를 생전에 알 수 없다고 답한다. 크리스티와 같은 훌륭한 작가조차 제게 주어진 진정한 평가를 온전히 알지 못하였고, 그러나 의심하며 꾸준히 작품을 써내려갔음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다.
 
실제 크리스티는 작품 가운데 그려지는 것보다는 살아생전 큰 성취를 거두었다. 장르문학 작가이며 여성작가라는 편견 또한 그녀에겐 장벽이 되지 못하였다. 일찌감치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멈추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갔다. 그로부터 마침내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닥터 후> 시리즈가 한 에피소드를 할애하여 애거서 크리스티를 등장시켰다는 점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스, 애거서 크리스티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다른 에피소드보다 더욱 큰 화제를 모은다는 점 또한 그렇다. 한국의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얼마나 우리의 옛 작가들이 비추어지는가를 생각하면, 제 문학에 대한 영국의 자긍심이 얼마나 높고 단단한가를 알 수가 있다. 그 자긍심이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건 예술을 애호하는 이들에게 몹시 흥미로운 일이다.
 
닥터 후 스틸컷

▲ 닥터 후 스틸컷 ⓒ BBC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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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적어봐야 알아듣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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