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6월에 개봉한 <인크레더블 헐크>는 마블 스튜디오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라는 세계관을 통해 직접 영화 제작을 선언한 후 <아이언맨>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인 영화였다. 연기파 배우 에드워드 노튼이 브루스 배너 역에 캐스팅되며 큰 화제를 모았지만 노튼은 <인크레더블 헐크> 이후 마블 스튜디오와 의견차를 보였고 결국 2012년에 개봉한 <어벤저스> 멤버로 합류하지 못하고 MCU에서 조기 하차했다.

노튼이 빠지면서 새로운 브루스 배너로 낙점된 배우는 마크 러팔로였다. <어벤저스>에서 처음 합류한 러팔로는 4편의 <어벤저스> 시리즈와 <토르: 라그나로크>, 드라마 <변호사 쉬헐크> 등에 출연했다. 쿠키영상에 출연했던 작품까지 합치면 마크 러팔로가 출연한 MCU의 영화와 드라마는 10편에 달한다. 비록 <인크레더블 헐크> 이후 솔로무비는 없었지만 러팔로가 연기한 브루스 배너는 MCU에서 매우 중요한 캐릭터로 활약했다.

하지만 지난 2003년에 개봉했던 <헐크>를 감상했던 관객들은 훗날 마블 스튜디오에서 만든 <인크레더블 헐크>와 <어벤저스>를 보면서 잠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MCU에 등장하는 녹색괴물과 2003년에 개봉한 <헐크>에 등장하는 녹색괴물은 그 이미지와 세계관 등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바로 에릭 바나가 브루스 배너를 연기하고 이안 감독이 연출을 맡았던 MCU와는 무관했던 또 다른 세계관의 <헐크>였다.
 
 <헐크>는 이안감독이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대규모 투자를 받아 만든 첫 영화였다.

<헐크>는 이안감독이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대규모 투자를 받아 만든 첫 영화였다. ⓒ UIP코리아

 
코미디 배우 출신의 진중한 캐릭터 전문 배우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난 바나는 현재의 진중한 이미지와 달리 1993년 코미디쇼에 출연하면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호주에서 배우생활을 이어가던 바나는 2000년 앤드류 도미닉 감독의 <차퍼>에서 광기 어린 사이코 연기를 선보이며 스톡홀름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바나는 이를 계기로 2001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호크다운>에 캐스팅되며 본격적으로 할리우드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할리우드에 발을 들인 바나는 2003년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의 신작 <헐크>를 통해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1억37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헐크>는 세계적으로 2억4500만 달러의 다소 아쉬운 흥행성적을 기록했지만 에릭 바나라는 배우를 세계 관객들에게 알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그리고 바나는 이듬 해 곧바로 볼프강 피터젠 감독의 <트로이>에 출연했다.

<트로이>에서 헥토르 역을 맡아 아킬레스 역의 브래드 피트와 연기대결을 펼치며 인지도가 크게 상승한 바나는 2005년 제임스 본드로 유명해지는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에 출연했다. 이후 호주와 미국을 오가며 활동을 이어가던 바나는 2008년 <천일의 스캔들>에서 헨리 8세 역을 맡아 나탈리 포트만과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한창 떠오르는 여성 배우들과 연기호흡을 맞췄다.

2009년 <스타트렉: 더 비기닝>에서 복수의 파괴자 네로를 연기하며 카리스마 있는 악역 연기를 선보인 바나는 같은 해 개봉한 <시간여행자의 아내>에서는 레이첼 맥아담스와 멜로연기를 보여 주기도 했다. 바나는 2011년 액션 스릴러 <한나>, 2013년에는 피터 버그 감독의 전쟁 드라마 <론 서바이버>에 출연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작품 숫자도 줄고 흥행성적도 2000년대만큼 좋진 않았다.

바나는 2017년 <알라딘> 실사판을 연출한 가이 리치 감독의 <킹 아서: 제왕의 검>을 통해 <트로이> 이후 오랜만에 시대극 액션 장르에 출연했다. 하지만 <킹 아서>는 제작비조차 회수하지 못할 정도로 흥행에 크게 실패했고 아서의 아버지 우서 펜드래곤을 연기한 바나 역시 거의 언급되지 못했다. 바나는 지난 5월 공개된 디즈니플러스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침과 데일: 다람쥐 구조대>에서 목소리 연기로 참여했다.

흥행 위한 타협 거부한 이안 감독표 헐크
 
 이안 감독의 <헐크>는 액션보다는 브루스 배너의 고뇌에 집중하면서 흥행에서는 다소 손해를 보기도 했다.

이안 감독의 <헐크>는 액션보다는 브루스 배너의 고뇌에 집중하면서 흥행에서는 다소 손해를 보기도 했다. ⓒ UIP코리아

 
<결혼 피로연>과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두 번이나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했던 이안 감독은 2000년에 개봉한 <와호장룡>이 북미에서만 1억3000만 달러에 가까운 흥행을 기록했다(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비영어 영화' 북미 최고 흥행기록이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데다가 흥행 감각까지 인정 받은 이안 감독은 할리우드로부터 1억3700만 달러의 거액을 투자 받아 블록버스터 액션영화 <헐크>를 만들었다.

사실 헐크는 오랜 기간 애니메이션과 TV시리즈(국내에서는 <두 얼굴의 사나이>로 방영된 바 있다)를 통해 세계 관객들에게 충분히 검증된 인기 캐릭터였다. 여기에 에릭 바나와 제니퍼 코넬리, 닉 놀테 등 신구조화를 이룬 괜찮은 배우 라인업까지 완성했다. 따라서 감독은 무난한 스토리에 적당히 멋진 화면과 화려한 볼거리를 연출해 관객들에게 헐크가 가진 매력과 폭발력만 잘 보여줘도 어느 정도의 흥행은 무난히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 감독은 흥행을 위해 적당히 관객들과 타협하는 연출가가 아니었다. 이안 감독은 <헐크>를 통해 화려한 액션보다는 인간 브루스 배너(에릭 바나 분)의 고뇌와 자아 찾기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만약 이안 감독이 <헐크>를 적당한 할리우드 액션영화로 만들어 흥행에 성공시키고 속편제작에 돌입했다면 <브로크백 마운틴>과 <색,계> <라이프 오브 파이> 같은 이안 감독의 명작들은 세상에 나오는 시기가 늦어졌을지 모른다.

MCU의 헐크가 변신 후 실제 배우의 외모와 크게 달라지는데 비해 이안 감독의 <헐크>에서 헐크는 변신 후에도 브루스 배너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헐크>에서는 브루스 배너가 위험에 빠진 동료 연구원을 돕다가 감마선에 노출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MCU의 헐크에서는 헐크가 어떤 이유로 감마선에 노출됐는지 나오지 않는다. 같은 캐릭터가 등장해도 두 영화가 다른 세계관을 다룬 작품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적지 않은 관객들은 이안 감독의 <헐크>가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는 슈퍼히어로 영화답지 않게 스토리가 지나치게 무겁고 심각하다'고 비판했다. 이는 <헐크>가 기대만큼 높은 흥행성적을 올리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헐크를 상징하는 괴력은 물론이고 헐크와 브루스 배너라는 두 인격, 로스 장군(샘 엘리엇 분)이 이끄는 군대와의 대립, 엄청난 생명력과 재생능력 등 헐크의 특징들을 잘 보여준 작품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브루스에게 도움 안 되는 여자친구 베티
 
 브루스 배너의 여자친구 베티 로스는 <헐크>에서도 '꽃병풍'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브루스 배너의 여자친구 베티 로스는 <헐크>에서도 '꽃병풍'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 UIP코리아

 
원작 코믹스에서는 감마선에 중독돼 헐크처럼 변신을 하기도 하는 베티 로스는 이안 감독의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의 청순한 여자친구 포지션을 지킨다. 하지만 아무래도 베티의 아버지 로스 장군이 헐크와 대립하는 입장이라 베티는 브루스를 위하는 마음과 달리 남자친구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물론 남성 관객들은 베티의 민폐(?)와는 별개로 아름다운 배우 제니퍼 코넬리를 볼 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1969년작 <내일을 향해 쏴라>를 통해 연기를 시작한 노장배우 샘 엘리어트는 2019년 <스타 이즈 본>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뒤늦게 빛을 본 배우다. <헐크>에서는 베티의 아버지인 썬더볼트 로스 장군을 연기했는데 코믹스에서 빌런으로 나오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군인의 본분과 임무를 위해 헐크와 대립한다.

1992년 <사랑과 추억>으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또 한 명의 노장배우 닉 놀테는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의 아버지이자 메인빌런이 되는 데이비드 배너 역을 맡았다. 물질이나 에너지와 동화하는 능력을 가진 데이비드는 헐크의 공격에도 전혀 충격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헐크는 "이 힘을 원한다면 모두 가져가요"라는 말과 함께 엄청난 감마에너지를 뿜어내며 '괴물이 된 아버지' 데이비드를 소멸시킨다.

<헐크>에는 한국관객들에게 반가운 얼굴도 등장한다. 바로 드라마 <로스트>로 이름을 알린 한국계 배우 대니얼 대 킴이다. 대니얼 대 킴은 <헐크>에서 로스 장군의 보좌관 역할을 하는 소령으로 두 신에 걸쳐 출연하는데 대사는 물론 출연분량도 매우 짧기 때문에 집중해서 봐야 한다. 또한 '마블의 아버지' 고 스탠 리 역시 초반 경비원 역으로 브루스 배너와 스쳐 지나가며 자신의 원작 영화에 변함 없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헐크 이안 감독 에릭 바나 제니퍼 코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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