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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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즈 코헛의 자기대상
'자기대상'은 자기심리학을 창시한 하인즈 코헛이 명명한 개념으로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가치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코헛은 육체적인 생존을 위해 물과 적절한 음식이 필요하듯, 심리적 생존을 위해서는 심리적 욕구에 반응해주는 공감적이고 지지적인 환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이런 지지적인 환경이 되어주는 대상은 주로 주양육자이다. 아기는 주양육자에게 생존에 필요한 환경을 제공 받음은 물론, 이들이 반영해주는 정서들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된다. 주양육자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심리적인 자양분을 제공하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대상이 바로 자기대상이다.
코헛은 사람은 평생토록 자기대상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내가 누구며 가치 있는 존재'임을 확인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유아기에는 주로 부모가 그 역할을 하지만, 청소년기가 되면 친구나 교사 혹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 등 자기대상의 폭이 넓어진다. 성인이 되면서는 연인이 자기대상이 되어주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이 비춰주는 사랑스런 나의 모습을 통해 내 존재 가치를 확인받곤 하는 것이다. 자기심리학에서는 성숙한 자기대상을 갖춰가는 것을 심리적인 성장이라고 본다.
기억해야 할 건 자기대상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내게 의미있는 사상을 실천하거나 어떤 활동을 하면서 '내가 가치 있고,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사상이든 활동이든 일이든 모두가 자기대상이 될 수 있다. 때로는 곁에 함께 있진 않지만, 나 자신을 비춰주었던 사람의 따스한 눈빛을 기억하는 것 역시 자기대상이 되어줄 수 있다.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던 책이나 예술작품이 자기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자기대상 되는 사람과 함께 있거나 그를 기억할 때, 혹은 그런 활동들을 실천할 때 우리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대상으로서의 발레
<나빌레라>의 덕출에게 발레는 바로 이런 존재다. 덕출이 발레를 처음 만난 건 9살 때였다. 그 때 덕출은 한눈에 발레에 빠져드는데 아마도 그는 발레리노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자기대상과 함께 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 그는 70세의 어느 날 친구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다 '음악 소리에 이끌려' 발레 연습하는 모습을 엿보게 된다. 이는 덕출의 마음 깊은 곳에 발레는 여전히 자기대상으로 살아 있었음을 의미하는 장면이었다. 1회 장례식 장면서 덕출은 "눈물이 왜 안 나냐"는 다른 친구의 질문에 "늙으면 이별도 익숙해지니까"라고 덤덤하게 대답하지만, 아마도 덕출은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마음 깊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남은 시간을 보다 생생하게 살아내고 싶은 욕구와 의지를 되살렸을 것이다. 덕출은 이날 채록이 발레하는 모습을 보며 '눈을 뗄 수 없었다'고 수첩에 적는다. 이는 처음 발레를 보았던 어린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 되고 그는 마침내 깨닫는다. '가치있고 생생하게' 살아내기 위해 발레를 해야 함을 말이다.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
이런 덕출의 마음은 흔히 말하는 꿈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과는 차원이 다르다. 꿈은 '되고자 하는 것'으로, 지금 여기서 생생히 머물기보다는 미래를 지향한다. 극 중 덕출의 사위인 영일(정희태)이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여기서 가치를 실천하거나 생생하게 살게 하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꿈이라 할 수 있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고 포기하는 것이 더 용기 있고 성숙한 행동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자기대상은 다르다. 지금 여기서 그것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아 있음을, 가치 있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인 자기대상은 포기할 수 없는 법이다.
때문에 덕출은 "발레가 자식들보다 더 소중해요?"(2회)라는 큰 아들 성산(정해균)의 말에도, "주책이냐"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에도, "난 이렇게 늙고 볼품도 없는데 정말 주책인지도 모르겠어요"(7회)라는 자괴감 속에서도 결코 발레를 포기하지 않는다. 9회 자신의 발레를 '취미'로 폄하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누가 뭐래도 상관 안 해. 포기도 안 해"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발레가 하나의 꿈이나 목표가 아닌 자기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0회 덕출을 두고 고민하는 채록에게 채록의 친구 세종(김현목)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닌데"라고 말한다. 이는 발레가 할아버지의 자기대상이었음을 간파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