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올림픽 기념관에는 이상호 선수가 올림픽 당시 착용했던 모든 의복과 장비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박장식
이상호 선수는 올림픽 첫 경기가 있었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관중들이 꽉 차고도 남을 정도로 계셔서 (나를) 응원해줄 줄은 몰랐다. 나뿐만 아니라 선수들 이름을 호명하는 걸 들으니 흥분도 되고 신이 났다"면서 "스노보드 종목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실 텐데, 보고 즐기면서 신나해 주니 힘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예선에서 3위를 기록한 이상호 선수는 16강에서도, 8강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예선 성적에 따라 블루 코스와 레드 코스 중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데, 그의 상대였던 예선 2위 슬로베니아의 잔 코시르는 주저 없이 레드 코스를 골랐다.
이날 경기에서 블루 코스는 이길 수 없는 코스로 악명을 떨쳤다. 레드 코스에 있던 선수가 DNF(넘어지는 등의 이유로 중도 포기 되는 것 - 기자 말)되지 않는 이상 블루 코스를 탄 선수가 승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호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눈밭 위에 섰다.
"상대가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욕심부리지 말고 질 땐 지더라도 침착하게 경기하자라는 생각으로 코스를 탔습니다. 처음에는 상대와 거리가 벌어졌는데, 막판으로 갈수록 점점 따라잡게 되더라고요. 피니시 직전에 떨어지는 턱 비슷한 것이 있는데, 여기서 '모험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이트에 가깝게 라인을 타는 모험을 하고, 피니시 라인에서는 몸을 최대한 낮추며 통과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0.01초 차이로 이상호 선수가 결승전에 진출하며 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피니시 순간 승리를 모른 채 들어왔던 이상호 선수는 전광판을 보고서야 승리를 알아차렸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들어오고 나서 전광판을 봤는데 이겼다고 나온 거예요. 이제 드디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표가 메달 색깔과 상관없이 포디움 위에 오르는 것이었는데, 그 최소한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특히 이상호의 메달은 '한국 첫 설상 종목에서의 메달'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는 "올림픽과는 거리가 멀었던 종목인데 메달을 획득하니까 더욱 많은 축하를 해주셨다"라면서도, "메달 플라자에 섰을 때에도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예선에서 조금만 더 잘 탔으면 애국가가 나왔을 텐데 싶었다"라고 아쉬워했다.
"'배추보이'요? 아직은 잘 어울리네요"
올림픽 이후 변화도 적지 않았다. 휘닉스 파크는 그가 평행대회전 경기를 뛰었던 슬로프 명칭을 '이상호 슬로프'라고 바꾸었고, 평창군에서는 '이상호 공원'을 조성하여 그의 메달 획득을 기념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 2월 열린 평창 올림픽 기념관에는 그가 올림픽 당시 입었던 의복은 물론 보드, 장비까지 모두 그대로 전시됐다.
본인이 체감하는 변화는 많지 않았다는 이상호 선수는 "올림픽 직후에는 많이들 알아보시곤 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평소에 알아보는 분들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스노보드 선수이다 보니까 스키장엘 가면 타는 것을 보고 '이상호 선수 아니세요?'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은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메달을 딴 이후에는 찾아주시는 분들도, 만나 뵌 분들도 많았다"면서도,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지만 운동선수이기에 기본적인 생활의 틀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운동선수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올림픽 전과 마찬가지로 선수로서의 해야 할 일은 그대로 똑같이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상호 슬로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선후배나 가족, 친구 모두에게 자랑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물론 처음 이름이 바뀌었을 때에는 어린 마음에 쑥스럽기도 했다. 일상복 입고 리프트 올라가는데 '이상호 슬로프 가자'는 분들이 보이면 더욱 그랬긴 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상호 슬로프에서는 매년 FIS가 주최하는 평행대회전 월드컵이 열린다. 이상호 선수는 "너무 기분이 좋다. 연습을 하고, 시합을 할 때면 올림픽 때 기억도 떠오른다"면서, "좋았던 기억이 많은 곳에서 매년 월드컵을 주최해 주시는 분들께 너무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
이상호를 상징하는 별명이 되어버린 '배추보이'에 대해서도 물었다.
"촌스럽지 않냐고 물어보는 분들도 사실 많아요. 하지만 입에 잘 붙는 별명인데다, 제 커리어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기도 하고요. 물론 나이가 조금 더 먹으면 약간은 창피할 것 같은데, 아직은 제게 잘 어울리는 별명 같아요."
이상호 선수는 비시즌을 어떻게 보낼까? 보통 부상 재활과 치료, 그리고 사이클 같은 체력 훈련에 중점을 두지만, 다른 취미도 있었다. 그는 "서핑을 한다던가 웨이크보드를 타는 취미가 있다"면서도, "FC 바르셀로나를 좋아하다 보니까 시즌 때도 시간이 맞으면 라리가를 즐겨 본다"라며 웃었다.
"4년이라는 시간, '눈 깜빡하니' 바로네요"
▲2020년 열린 평창 스노보드 월드컵에서 특별 장내아나운서로 나섰던 이상호 선수.
박장식
이상호 선수는 최근 보드를 바꾸었다. 평행대회전 코스에서 지나는 게이트의 간격이 점점 길어지는 추세인데, 그에 최적화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직 보드에 완벽하게 적응하진 못했다고 한다. 더욱이 코로나19 탓에 보드를 몸에 익힐 시간이 줄어 어려움이 컸다. 그래도 이상호 선수는 "시즌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장비들이 점점 몸에 맞아가는 기분"이라며 "다음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서 더욱 완벽하게 보드에 몸을 맞추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이상호 선수는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열릴 장자커우도 2019년 열린 아시안컵과 월드컵을 통해 미리 경험해본 바 있었다. 그에게 '올림픽 슬로프'의 평가를 부탁하자 "코스 자체가 크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시합의 난이도가 쉽지 않다"면서, "테크닉보다는 한 치의 실수 없이 타야 하는 점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난 시즌 입은 부상도 완벽히 회복했고, 장비도 내 몸에 맞아가고 있으니 베이징 올림픽 준비는 더욱 잘되지 않을까"라면서 "베이징에 가면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애국가가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세 가지를 물었다. 2021년에 떠올리는 '올림픽'과 '평창', 그리고 '올림픽 메달'은 어떤 느낌일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올림픽'은... 눈 깜빡하면 다가와 있는 것 같아요. 생애 첫 올림픽이었던 평창 올림픽이 끝났을 때에는 4년 뒤가 까마득하게 멀 줄 알았는데, 막상 다음 올림픽이 다가와 있네요.
평창은 이름만 들어도, 땅 위를 밟기만 해도 언제나 기분이 좋습니다. 올림픽과 관련된 조형물을 보면 올림픽 때 기억도 많이 떠오르곤 합니다. 최근에는 제 이름을 딴 '이상호 공원'도 평창에 생겨서 스키장에 갈 때마다 마주치게 되네요.
메달은 제게 자긍심입니다. 사람이 언제나 긍정적일 수는 없잖아요. 기대했던 것보다 시합 성적이 좋지 못할 때도 평창 올림픽의 메달을 생각하면 다시 극복하고 노력할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때의 좋은 성적, 그리고 메달이 어떻게 보면 제 뒤를 잘 받쳐주는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요."☞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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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이야기를 찾으면 하나의 심장이 뛰고, 스포츠의 감동적인 모습에 또 하나의 심장이 뛰는 사람. 철도부터 도로, 컬링, 럭비, 그리고 수많은 종목들... 과분한 것을 알면서도 현장의 즐거움을 알기에 양쪽 손에 모두 쥐고 싶어하는, 여전히 '라디오 스타'를 꿈꾸는 욕심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