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습 중에 얻은 용기 "대본 외우는 작업이 너무 힘들었어요. 대본이 너무 많아서, 대본 외우느라 아무것도 못할 지경이었죠. 나중에 동선까지 같이 맞추는데, 너무 헷갈리고 '멍'해졌죠. 일주일 연습하면 수요일까지 잘하다가 목요일쯤 그게 꼭 오더라고요. 연습하면서 자괴감도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박소영 연출이 좌절하지 않게끔 '잘 하고 있다'라고 용기를 줬어요. 좌절할 수 있는 요소가 너무 많은 작품이고, 연출도 이 작품 외적으로 힘든 게 많은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제게 힘이 많이 됐어요." ⓒ 곽우신
피츠윌리엄 다아시. 혈통으로는 백작 가문과 이어져 있고, 재력으로는 1년 수입이 4만 파운드나 되는 남자. 장미전쟁 이후 몇 남지 않은 '진짜' 귀족들을 제외하면, 19세기 영국의 상류 계급이었던 젠트리(Gentry) 내에서도 그는 비교 대상이 드문 존재였다. 그는 사실상 귀족이나 다름없는, 명백한 지배 계급의 일원이었다.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한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리지) 베넷이 별 볼 일 없는 여자라는 뜻은 아니다. 밝고, 활달하고, 똑똑한 리지는 미스터 베넷의 자랑이다. 하지만 당시의 결혼은 부와 지위, 명예를 위한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다. 그 사람 내면의 아름다움, 인격의 성숙함, 당사자들 간의 감정적 교류 등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니까 다아시가 지나치게 오만했던 걸, 온전히 그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다아시는 활력이 넘치는 리지에게 반했고, 그에게 청혼할 때만 해도 설마 거절당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넷 역시 사교계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젠트리 계급의 일원이었지만, 1년에 4천 파운드 정도의 수입을 얻는 찰스 빙리(물론 물려받은 10만 파운드의 유산이 있지만)와 장녀 제인의 결합도 환영하는 정도의 위치에 있는 가문이었다.
당시의 통념상, 다아시가 리지에게 청혼하는 건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격이었을 테다. 그러나 다아시는 자신의 청혼이 얼마나 무례한 언어로 점철되어 있는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리지가 그런 사회적 '통념'에 따라 움직이는 이가 아님을 미처 알지 못했다. 리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기주장을 당당히 내보이는 장점을 가진 이였다. 동시에다아시의 오만한 태도 안에 숨어있는 진정성까지 파악하기에는, 편견이라는 베일도 쓰고 있는 상태였다.
다아시가 그냥 그렇고 그런 인간이었다면, 외적 조건만 충만하고 내적 함량이 미달인 사람이었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다아시는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오만을 떨쳐버리는 계단으로 삼는다. 그는 섬세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리지에게 다가가고, 리지 역시 이전까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다아시의 매력들을 알게 되며, 그에 대한 선입견을 벗게 된다. 제인 오스틴의 명저 중에서도 불후의 작품으로 불리는 <오만과 편견>이, 200년을 넘어 동명의 연극으로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서로를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오만한 남자, 사랑에 빠지다
▲ 다아시의 진심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는 리지와 베넷 가문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주기 위해 열성적으로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신의 재력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자칫, 돈 많은 남자가 가난한 여자를 도와주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을까? 배우 홍우진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 부분이 부각될 거라고는 생각을 안 했어요. 다아시의 행동과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작품 안에서 리지가 볼 것이라고 생각했죠.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라는 생각을 리지가 계속 하는 건 다아시의 재력 보다는, 어떻게든 열심히 하는 모습과 그의 변화된 태도 때문이죠.” ⓒ 곽우신
"저도 다아시에게 공감이 잘 되지는 않았어요.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쟤 뭐야' 막 그런 생각이 들게 되죠. 연습하면서 '아, 그래. 쟤는 이런 환경에서 귀족으로서 살아왔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게 되더라고요. 다아시는 표현할 줄도 모르는데다가,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은 상대에게 두려움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시대상황에서, 남작부인도 그렇게 말할 정도의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잖아요.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에게…. 어떻게 보면 도전이죠. 다아시가 삶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취하지 않았던 행동을 한다는 건 엄청나게 큰 도전이죠.
자기도 모르는 그 두려움 때문에 리지에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첫 번째 청혼도 진짜 힘들게 용기내고 고민을 많이 해서 했는데, 그런 거절을 당하니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첫 만남 때부터 리지가 참 마음에 들었을 거예요."
지난 10월 22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홍우진 역시 처음부터 다아시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을 처음 관람하게 되는 대부분의 관객 역시, 특히나 원작을 모르고 보는 입장이라면 1막에서 다아시의 태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나치게 차가울뿐더러, 그의 화법은 겸양인지 조롱인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건, 다아시는 처음 만난 리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역시 극 중 표현처럼 리지의 '활기' 때문일까?
"활기 있는 모습이 좋다고 하지만.... 우스갯소리로 하면 '나한테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거죠. 그게 정말 우스갯소리인데, 다아시에게는 정말로 리지가 너무 새로웠을 것 같아요. 그 집안 가족들 천박하기는 한데 이상하게 끌리는…. 그리고 리지는 왜 저렇게 당당하지? 그 모습이 굉장히 매력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예전에 안 그랬는데, 밝고 활기찬 성격의 사람이 참 예뻐 보인 경험이 있거든요. 귀족들 사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의 사람이었겠죠."
작품 속에서 다아시는 '오만', 리지는 '편견'을 상징한다. 다아시의 전사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기득권 가문의 일원으로서 부족한 것 없이 자라온 인물이었을 것이고, 대개 권력을 쥔 쪽이 그렇듯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리지에 대한 청혼이 거절당하고 나서, 그가 받았을 충격과 상처는 분명 작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라고 폭력적으로 나서는 이도 아니었다.
"받은 상처보다 사랑이 더 컸겠죠. 첫 번째 청혼했을 때 받은 상처‧모욕 이런 것들 보다, 내가 이 사람을 더 좋아하는 마음이 크니까요. 그리고 위컴에 대한 얘기를 할 때도 사실은 이렇지 않다라는 걸 해명하고 싶었을 테고…. 그러면서 다아시가 조금 더 성장해나가는 과정이랄까요? 리지가 아니었다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오히려 더 쳐내고 공격을 할 수도 있을텐데 이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니까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아, 이게 사랑이구나' 했겠죠.
다아시에게는 오만함과 더불어 편견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면서 '내 사랑을 받아줘!'라고 하는 그 자체가, 자기가 그렇게 하면 당연히 리지가 청혼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편견이죠. 자신의 위치 등으로 인해서 갖고 있던 편견이 어그러졌을 때, 하나를 더 배우면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후에 리지를 따뜻하게 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홍우진의 오만과 편견
▲ 사람은 변한다, 어떤 방향으로든 “좀 웃기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옛날의 제 모습을 생각하면서 ‘아, 변해가는구나’하게 돼요. <레드북> 생각도 많이 들고. 두 사람이 변해가면서 둘이 같이 성장해나가는 드라마잖아요. 참 뻔한 이야기인데도 굉장히 매력 있죠.” ⓒ 곽우신
▲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 “아침에 아이한테 가끔씩 잠깐잠깐 애니메이션을 틀어주는데, 꼬마애가 토끼와 같이 우주여행도 다니는 게 있어요. 아내한테 그 작품을 설명하는데 제가 ‘아, 그 흑인 꼬마 나오는 거’라고 말을 하는 게 ‘아, 이거는 좀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에 그 아이가 백인이었으면 ‘그 백인 꼬마 나오는 거’라고 했을까요? 이런 고민을 해야, 아이가 커나가는 데 조금 더 나은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 곽우신
배우 홍우진은 솔직하고 털털한 사람이다. 인터뷰를 요청하면 "같이 수다나 떨어요"라고 흔쾌히 받아들이고, 사진 촬영이 있는데도 편한 복장으로 현장에 나타난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데, 미룰 수도 있는 약속을 일부러 티 안 내고 지키기 위해 자리한다. 그와 인터뷰를 하다 보면, 가감 없이 쏟아지는 이야기에 잠깐 당황하면서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기 생각과 의견을 드러내는 그 앞에서 같이 솔직해진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그 부족함을 인정하고 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용기'가 있는 사람이기에, 자신이 갖고 있던 '오만'과 '편견'을 고백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저는 양쪽 다 있죠. 저는 학교 다닐 때 정말 오만함의 집합체였고, 그게 점점 깨져나가는 과정 안에서 아직도 사는 것 같아요. 그거를 많이 도움을 준 게 제 아내예요. 아내가 아주 현명해서, 제가 조금이라도 오만하거나 편견을 가진 생각을 내뱉거나 하면 바로바로 '커트'해주거든요. 저는 또 이제 말 잘 듣거든요. (웃음) 아내가 이야기해줄 때마다 '그렇구나' '알았어'라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그리고 처음 이 공연을 시작할 때의 저와 지금의 저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이 공연을 하고, 연기하면서도 배우는 게 많아요.
저는 저 스스로 잘났다는 생각에, 오만함을 갖고 다른 사람들을 평가했어요. 하다못해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런 식의 말과 행동들이 주변 분위기를 휩쓸어가고, 유머러스하게, 재밌게만 말하면 다 되는 거였잖아요.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그랬던 제가 좀 많이 바뀌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다른 회사에 다니거나, 아니면 내 삶에만 치어 있었으면 오히려 더뎠을 텐데, 공연계는 그런 문화를 흡수하고 접하는 게 빠르잖아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이 있었고, 그 덕분에 저도 노력을 많이 하게 되고, 이제 점점 변해가기 시작하는 거죠. 생각도 들고. 그래서 편견도 많이 사라지고 오만함도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 가장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인물 “미스터 베넷이요. 자식을 낳고나서인지, 마지막에 미스터 베넷이 리지에게 ‘너 정말 그 사람이랑 결혼해도 괜찮겠니?’라고 물어볼 때 ‘사랑해요. 그 사람 좋아하고 있어요’라고 답하는데 ‘울컥’하더라고요. 물론 저는 딸은 없지만, 만약에 딸이 있었다면…. 오, 어느 날 연습하는데 그 부분에서 울컥하면서 눈물이 막 나려고 하더라고요. 뭐 평소에 아내한테 장난치거나 유머러스한 부분들도 저하고 제일 비슷하고요. (웃음)” ⓒ 곽우신
그러한 고민은 작품 안에서도 잘 드러난다. 연극 <오만과 편견>은 2인극이다. 남배우와 여배우 둘이서 무대 위 21명의 캐릭터를 모두 소화한다. 성별에 따라 배역이 구분되어 있지도 않다. 홍우진은 다아시이기도 하지만, 베넷 가 첫째 딸인 제인 베넷도 된다. 별다른 분장이나 의상의 큰 변화도 없다. 들고 있는 소품에 따라 발성과 연기 톤을 바꿔가며 다양한 역을 소화한다.
이 과정에서, 흔히들 남배우가 여자 배역을 소화할 때 클리셰처럼 쓰이는 과장된 연기를 최대한 피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부러 과도한 하이 톤을 쓰거나, 사회적으로 소위 '여성스럽다'고 정의된 제스처를 배제하기 위한 노력이 작품 곳곳에서 그리고 무대 위 배우들에게서 드러난다. 특히 홍우진의 경우, 이전 <레드북> 때 여장남자인 로렐라이를 연기하며 이 같은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게 참 어려워요. <레드북>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레드북>에서 로렐라이를 연기하는 건, 내가 사랑했지만 죽은 사람의 모습과 삶을 따라 하는 것인데, 내가 목소리마저 '여성스럽게' 해야 하는 건가 싶었어요. 사실 30년 가까이 그렇게 연기를 하는 걸 봐왔고, 해왔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그냥 내 목소리로 하는 게 더 낫겠는데?' 싶었죠. 남자 목소리로 연기를 해도 그게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하면서 그때 여러 시도를 했던 게 이번에 <오만과 편견>까지 넘어온 거예요.
물론, <레드북>의 로렐라이와 <오만과 편견>의 제인은 다르죠. 제인이 작 중 여성 캐릭터 중에서는 두 번째 비중이지만, 성격이 로렐라이 같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그 선을 잡기가 되게 애매하더라고요. 공연하다가 '아, 이거 완전히 힘을 빼야겠다' 싶었죠. 하이 톤으로 계속하면, 나중에는 목소리 내기가 기능적으로도 힘들어요. '그냥 <레드북> 때 내가 했던 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했어요. 나한테 주어진 과제니까, 꼭 높은 목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인물이 잘 보일 수 있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태도나 눈빛으로 보여주니까 오히려 더 캐릭터를 표현하기 편해지더라고요."
관객들과 함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 <오만과 편견>은 그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을까? “만족스러웠던 시간들이 될 것 같아요. ‘정말 내가 이걸 해냈구나’ 그런데 해낸 것에 그치지 않고 ‘와 공연하고 있는 게 너무 즐겁다’ 싶어요. 하면서도 재밌고, 보면서도 재밌는 작품은 두 번째인 것 같아요. 저는 보통 하는 게 재미있지, 보는 건 별로 재미 없거든요. (웃음) 그런데 이거는 보면서도 참 재밌어요. 그래서 4연까지는 하겠다고 했어요. 대본 외운 게 아까워서라도. (웃음)” ⓒ 곽우신
"관객 입장으로 봤을 때 너무 재밌어요. 길다고 하면 긴 공연인데, 쉬지 않고 바뀌는 모습에 홀려서 보고 있으면 어느새 1막이 끝나죠. 저도 똑같이 경험을 했거든요. 초연 때 별 생각 없이 보러 갔어요. 별 생각 없이 갔다가, 어우, 둘이서 너무 재밌게 해버려서…. 일단 연출이 잘 만들어놓은 그림들이 재미있고, 또 연출이 그린 그림 위에 배우들이 잘 움직였죠. 그래서 관객 분들이 좋아하지 않나 싶어요. 관객들이 극장 나가면서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되면 '그래, 나만 재밌는 게 아니지' 싶어요.
사실 초연 때 박소영 연출이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었어요. 그때 매체 촬영이 있어서 안 될 것 같다고 거절했거든요. 그런데 정작 촬영은 계속 뒤로 밀리면서 그 시간이 비게 되었어요. 초연 때 딱 보고 '아! 이럴 거면 할 걸. 저렇게 재밌는데!' 했었죠. 그리고 나서 연락이 왔으니까 별 고민 없이 바로 회사에 스케줄 물어보고 하게 된 거죠.
사실 방송 쪽으로 넘어가서 연기를 하면서 아쉬운 게 많았어요. 영화나 드라마는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공연에서 주인공이 채우는 시간과는 다르잖아요. 조금 더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늘 있었는데, 이 공연에서는 늘 쉴 새 없이 연기를 하니까요. 예전에 아는 형들이 '아, 공연하고 싶다'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번에 처음 알겠더라고요. 연기에 대해 허전했던 걸 잘 채워주는 게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올해로 딱 만 40살이 된, 1980년생 배우 홍우진은 대학로에서 내공을 오래 쌓아 왔다.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등에서 이미 그의 재치와 순발력이 증명된 바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나 영화의 조연이나 단역으로도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지만, 여전히 그에게 대학로는 애정이 가득한 공간이다. <오만과 편견> 출연을 수락하게 된 건, 그가 하는 배우로써가 아니라 '관객'으로써 보는 게 재미있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배우로써 소화하기는 여간 쉽지가 않았다. 다양한 작품을 두루 거쳤던 그에게도.
"아니 근데 또 <오첨뮤>(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하고는…. <오첨뮤>는 너무 지옥 같았고…. (웃음) <오만과 편견>도 고통스러워요. 아직도 등장하기 전까지 떨려요. 내가 만약에 어제 어떤 대사를 틀려서 그 부분을 막 연습해서 '딱' 하면 또 다른 부분을 틀리고…. 나는 막 자괴감에 빠져있는데, 초연 때 했던 배우들이 당연한 거라고, 우리도 클리어하게 한 적이 없다고 위로해줬어요. 이번에 윤나무랑도 같이 드라마를 하거든요. 얼마 전에 테스트 촬영하러 갔는데, 나무가 '형 공연 잘 되느냐'고 그래서 '아, 미쳐버리겠다. 안 틀리는 날이 없다'고 하니까 '아 그건 안 틀릴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나 스스로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공연이죠."
흔히들 '사람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고 한다. 사람과 관계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때로는 이 말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 사람을 고쳐 쓰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고쳐 써야 하는가. 부족한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없다면, 우리는 왜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고, 같이 보듬는 걸까. 연극 <오만과 편견>을 다아시와 리지가 서로를 고쳐 쓰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홍우진은 "아내가 나를 고쳐 쓰고 있다"라고 웃으며 공감해주었다. 다아시와 리지의 성장에서 드러나듯, 우리는 고민과 반성을 통해 어제보다는 내일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한 때 무례를 저질렀을지언정, 그 사람에게 온전히 사랑받을 수 있을만큼은. 이 작품을 보고 극장을 나가는 관객들에게 배우가 전하고 싶은 말도 이런 맥락이었다.
"우선, 관객들께서 홍우진의 노력을 제일 먼저 알아주셨으면 좋겠고…. (웃음) 보고 재미로만 넘어가는 게 아니라, 다아시나 리지가 가지고 있었던 오만과 편견을 사실 우리도 갖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아니, 나는 그렇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드러나는 부분들이 많죠. 삶을 한 번 돌아보고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되게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있고, 또 오만하게 사람을 대하잖아요, 의도치 않게. 저는 그 사람이 꼭 나빠서가 아니라, 살아오고 배우고 자라온 환경 이런 게 크다고 생각해요.
다아시도 그런 것들이 리지로 인하여 깨지게 됐고, 이 공연 한 편으로 인해서 그런 생각을 잠시 잠깐 할 수 있게 된다면 삶의 큰 변화일 거라고 생각해요. 시작이 중요하잖아요. 그런 생각을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변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어찌 보면 진부한 내용이잖아요. 너무 뻔한 교훈이지만, 그게 보편화되지 않은 세상이니까요."
▲ 연극 <오만과 편견> 포스터 관객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한마디를 부탁했더니,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멈추지 말고 공연을 보러 와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활동의 반경을 넓히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무대를 가장 사랑하고,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는 걸 좋아한다. 연극 <오만과 편견>은 29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스24 스테이지 3관에서 관객을 맞는다. ⓒ 달 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