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 북>의 한 장면.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돈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 분). <그린 북>은 얼핏 평범한 설정의 로드무비로 보이기 쉽지만 지적인 흑인과 무지한 백인의 구도와 같은 뒤집기를 통해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CGV 아트하우스
흑인을 혐오했으나 어쩔 수 없이 그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선 토니는 남부의 사내들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오직 피부색깔을 이유로 돈 셜리를 모욕하고 폭력을 가하는 백인들에게서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을 본 것이다. 타인에게서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그 불편한 경험 속에 무려 8주 동안이나 놓여 있던 토니가 변화하는 건 필연에 가까운 일이다.
영화는 누구보다 가족과 친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토니가 마침내 돈 셜리를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이기까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애정의 드라마인 동시에 이해의 드라마로 그려진다. 함께한 여정 속에서 토니는 돈 셜리에게 가해진 모욕과 폭력이 그가 흑인이 아니었더라면 당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친구가 되기를 선택한다.
예고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영화는,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버디무비이자 로드무비다. 영화의 끝에서 관객들은 마음 따뜻한 감동을 안고 어쩌면 뜨거운 눈물까지 흘릴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와 같은 감동과 눈물도 극장을 나서면 금세 식어버리고 말 거라며 웃어버릴지 모른다. 예술을 업으로 삼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피터 패럴리 감독 역시 그와 같은 회의주의자들을 수도 없이 만나왔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감독은 영화가 그저 영화로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멋스런 방식으로 웅변한다. 이 따스한 영화를 한 층 빛나게 한 이 장면은 토니가 제 별명인 '떠버리 토니(Tony Lip)'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별명인지에 대해 돈 셜리에게 떠벌이던 순간이다.
떠버리란 별명이 결국은 거짓말쟁이란 뜻 아니냐고 묻는 돈 셜리에게 토니는 떠버리(Bullshit artist)와 거짓말쟁이(Liar)는 다르다고 반박한다. 거짓말쟁이는 거짓을 전할뿐이지만 떠버리는 다른 이를 믿게 만드는 것이니 훨씬 대단한 일이라는 것이다.
"Liar가 아니라 Bullshit Artist라구요"
▲영화 <그린 북>의 한 장면. 흑인이란 이유로 양복점에서 옷을 입어보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상황 등을 겪으며 토니(비고 모텐슨 분)는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의 처지에 공감하게 된다.CGV 아트하우스
어쩌면 이 장면이야말로 피터 패럴리 감독이 영화를 바라보는 방식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를 움직여내는 영화의 힘, 그것이 피터 패럴리가 <그린 북>과 같은 영화를 찍어낼 수 있었던 비결일지도.
여전히 피부색으로, 성별로, 재산과 학력, 생김과 나이로,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것들로 인간을 구분 짓고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주변에 너무 많은 나머지 가끔은 나조차 그와 같은 색으로 물드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좌절하게 된다. 변하지 않는 현실에 실망하고 나빠지는 무엇에 절망하는 것이다. 그러다 급기야는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여기 결코 닿지 않을 것만 같던 두 개의 세계가 마침내 포개지는 순간으로부터 어떤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가 있다. 그는 진정으로 한 세계를 다른 세계와 만나게 할 수 있다면 그로부터 희망적인 균열이 일어나리라고 확신에 차 말한다. 영화 속 토니가 그렇듯 자신감 있게, 걱정이나 슬픔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말이다.
비록 그것이 떠버리의 헛소리(Bullshit)에 불과할지라도 믿고 싶어지는 건 그가 진짜 예술가(Artist)이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 만큼은 세상이 틀림없이 바뀔 거라고 믿게끔 하는 위대한 예술가 말이다. 세상에 그런 예술가들이 많아진다면, 지구는 틀림없이 더 멋진 곳이 될 텐데 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