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배우 카이의 자부심은 '노력' "저는 어떤 작품과 어떤 회사와 작업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제가 어떤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제가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그래도 예뻐해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당연히 약점이 있지만 ‘아, 그 배우는 참 열심히 하는 배우야’라는 부분에서 저를 믿어주시고 찾아주시는 거 같아요. 그런 게 너무나 감사하죠." ⓒ EMK뮤지컬컴퍼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루돌프는 지쳤다.
합스부르크의 피를 이어받은, 제국을 물려받을 사람이지만 그에게 황태자라는 지위는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어머니인 '씨씨(Sisi)' 엘리자벳이 떠난 이후, 아버지인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억압적인 통치를 계속해나가고 있다. 루돌프가 봤을 때 시대는 바뀌고 있었다. 민중이 원하는 바도 명확하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역사의 물결을 아버지는 역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정략결혼을 하고, 정치적인 행사에 얼굴로 동원되고, 합스부르크 가의 다른 계승자들과 비교당하고…. 끊임없이 감시당하는 루돌프는 '황태자' 루돌프일 때보다, 자유주의 신문에 '줄리어스 펠릭스'라는 이름으로 칼럼을 보낼 때 보다 더 자기자신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알아봐 준 유일한 이가 있었다. 마리 폰 베체라. 별 볼 일 없는 베체라 남작 가문의 딸. 하지만, 마리는 줄리어스 펠릭스의 글에 매료된 사람 중 한 명이었고, 그 글 속에 담긴 신념과 내일을 사랑했다.
그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이 만났다. 기성세대가 지배하는 낡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었던 연인. 그러나 세상은 그들이 온전히 사랑하는 것조차 용인하지 못했다. 루돌프와 마리는 반지를 나누며 그들이 이 세계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저항-자살을 택한다. '죽음을 넘어 사랑 안에서 하나 되리' 이들의 반지에 새겨진 문구처럼.
오는 3월 11일까지 관객을 만나는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의 이야기이다. 초연과 재연 당시 <황태자 루돌프>라는 이름으로 상연되었던 이 작품이 삼연으로 돌아왔다. 이번 시즌, 주인공 루돌프로 쿼드로플 캐스팅된 배우 중 하나인 팝페라 가수 '카이'를 지난 1월 12일 만났다.
카이, 루돌프를 만나다
▲ 루돌프에 대한 고민은 현재진행형 "저는 지금까지 제가 한 캐릭터에 대해서 마침표를 찍어본 적이 없어요. 끝나는 날까지 궁금하고, 끝나는 날까지 그 캐릭터를 향해서 물어보고…. 마지막까지 갈등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에는 첫 시작과 공연 끝나는 날 다른 모습인 경우도 있어요." ⓒ EMK뮤지컬컴퍼니
<복면가왕>의 패널로 활약하면서 MBC 방송연예대상 쇼 시트콤 남자 신인상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사실 패널보다는 복면을 쓰고 무대 위에 있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니'로 나서 결승 무대까지 오른 바 있다) 훤칠한 키, 시원한 마스크, 단단한 소리에 연기도 안정적이다. 바리톤으로 성악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이후, 크로스오버 가수로 그리고 뮤지컬 배우까지…. 카이라는 인재가 뮤지컬을 안 했다면 무척 아쉬웠을 것만 같다. 그만큼 한국 뮤지컬계에 소중한 자산 중 한 명이다.
뮤지컬 무대에 입문하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거친 후, <두 도시 이야기>부터는 꾸준히 대극장 작품을 맡았다. <팬텀> <아리랑> <삼총사> <잭 더 리퍼> <몬테크리스토> <벤허>…. 그의 필모그래피는 창작과 라이선스, 초연과 재연 이상의 레퍼토리, 주연과 조연을 망라한다. 그 와중에 연극 <레드>처럼, 인상적인 소극장 작품도 가져갔다. 그가 무대 위에서 걸어온 길만 봐도, 카이라는 배우가 공연을 정말 사랑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더 라스트 키스>도 하고 싶은 작품 중 하나였다.
"제 별명이 '정뮤덕'이에요. 초연과 재연 다 봤어요. 하고 싶었냐고요? 물론이죠. 모든 뮤지컬 남자 배우 분들의 로망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워낙 유명한 넘버도 많고, 굉장히 매력적이잖아요. 사랑에 헌신적인 것도 있고,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귀여울 때도 있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니까요.
덕분에 루돌프와는 아주 잘 인사했어요. 다른 작품에 비해서 빠른 인사를 했던 것 같아요. 아주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작품이기도 하고, 항상 초연과 재연 때 다른 배우님들이 하시는 걸 보면서 '나에게 이 역할이 주어진다면 이런 식으로 하고 싶다'는 계획이 머릿속에 있었어요. 연습이 지나면서도 그 계획은 변하지 않았고, 연출께서도 제가 시도해보는 것들에 대해 굉장히 흡족해하셨어요.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그가 루돌프에 조금 더 쉽게 감정이입하고 적응할 수 있었던 데는 자연인 정기열(본명)과의 교집합이 많았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흔히 작품 속에서 혁명의 선봉에 서거나 굳건한 신념으로 무장한 인물들과는 다소 다르다. 우리가 흔히 선택할 수 없기에 더 멋진, 하지만 '나'라고 생각하기엔 다소 거리가 있는 '깃발'들. 루돌프는 깃발이라기 보다는 본인의 안에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강력하게 관철하기에는 고민이 많은 인물이다. 그 갈등과 고뇌가 인물을 보다 인간적으로 만든다.
"저랑 닮은 점이요? 너무 많죠. 분명 A형이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웃음) 참 생각이 많아요. 무모할 정도로 용기를 내기도 하는 반면에, 때로는, 너무 작은 부분에도 큰 상심을 하죠. 한 가지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다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 피해받지 않을까 너무 많이 배려하고요. 그런 부분이 굉장히 저랑 비슷한데, 루돌프는 황태자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와는 또 비교할 수 없는 수많은 그리고 더 큰 짓눌림이 있었겠죠. 황태자라는 역할을 안고 태어난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련과 고난이 있었을 것 같아요. 강력한 신념이 있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도 없이 흔들리는 그런 면이 저랑 가장 참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 '정이오'에 대한 해명 “저는 몰랐는데, (웃음) 매니저한테 들었어요. <팬텀>을 준비 중이었을 때, 공개 프리뷰가 원래 배우들에게 25일이라고 공지가 됐었어요. 제가 다른 공연에서 그 얘기를 했는데, <팬텀> 초연 때 시간이 부족해서, 공개 프리뷰가 취소되고 드레스 리허설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심지어 다른 배우들과의 일정 조율 때문에, 저는 그날도 결국 못하고 나중에 했거든요. 결국 ‘정기열이 사기쳤다’, ‘거짓말했다’가 되어버려서…. (웃음)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경솔했어요. 실언을 했습니다.” ⓒ EMK뮤지컬컴퍼니
끝없이 고민하고 흔들리는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돌프를 '유약한 황태자'로 가두고 싶진 않았단다. 그가 해석하고 만들어가는 루돌프는 커튼이 처음 올라갔을 때와 내려갈 때의 갭이 상당히 큰 루돌프이다. 스테파니 황태자비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지금의 현재 상태에 대해 짜증과 분노를 옅게나마 표출한다. 하지만 그의 침묵과 한숨에는 이미 닳고 닳은 무언가도 엿보인다. 그는 아마도 이전에 여러 번 무언가를 시도했을 것이고, 실패했을 것이고, 좌절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이 감정을 폭발시키기에는 너무도 지쳐 보였다.
"제가 처음에 의도했던 바가 정확히 그런 시작이었어요. 저와 함께 루돌프 역을 맡은 다른 배우들은 다른 생각일 수 있겠지만, 저는 루돌프가 유약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지쳐있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게 사실이에요. 그가 만약 정말 유약했더라면, 한 사람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다만 시대적 상황과 자신의 입장을 고려했을 때, 매일 참고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고단했던 인물 같아요.
제가 루돌프를 하기로 했을 때, <벤허>했던 왕 연출님과 밥을 먹었어요. 연출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루돌프가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라고요. 그래서 '왜요?'라고 물으니까 '한 나라를 지키는 것보다 어려운 게 한 여자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의 뜻을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누군가 책임을 다해서, 사랑하는 여자와의 자기 나름의 기준에 행복한 결말을 위해 죽음까지 각오한다는 건 절대 유약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누구도 미워할 수 없던 황태자
루돌프는 마리를 만나 이전과는 다른 인물로 변모한다. 그렇게 작품은 루돌프와 마리의 사랑 그리고 자유로운 세상을 향한 루돌프와 마리의 꿈을 바퀴로 삼아 굴러간다. 정치적으로 보잘 것 없는 몰락 귀족 가문의 사람을 사랑하는 황태자. 제국주의가 횡횡하던 시대에 아래로부터 끓어오르던 자유주의의 물결이 새 시대의 흐름이라 믿은 황태자. 카이는 두 축 중에 어떤 쪽의 황태자가 더 다가오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저는 그 두 개가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황태자로서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하고, 동시에 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형님들이나 선배들을 보면, 직장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열심히 일을 하잖아요. 그건 도덕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노동을 통한 '자아성찰', '자아실현'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하는 것도 있잖아요. 저는 루돌프가 느꼈던 정치가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남자로서의 책임감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 두 개가 다 자신이 선택한 길 혹은 선택당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려는 그 사람의 신념처럼 느껴져요. 둘 다, 루돌프의 강력한 의지라고 생각이 들어서…. 분리가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일로 가는 계단'을 부른 장면에서…. 그 군중 속에 마리가 있거든요. 저는 그 군중이 곧 마리고, 마리가 곧 군중 같아요. 노래를 하면서 미래를 향한 굉장한 환희와 희망에 차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정치적인 얘기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마리를 향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정치적인 선택이 곧 마리를 향한 것이고, 마리를 위한 선택이 곧 정치적인 선택인 거죠. 마리가 원하는 세상이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또 마리를 행복하게 하는…. 마리가 곧 민중이고, 민중이 곧 마리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르게 되더라고요."
▲ '선배' 카이의 조언 "가끔씩, 이제 막 시작하는 후배들이 저에게 한두 가지 질문을 던질 때가 있어요. 노래는 이렇게, 연기는 이렇게 하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누구한테도 별 얘기를 하지 않아요. 할 수도 없고요. 제가 그럴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딱 한마디 할 수 있는 건, 죽도록 열심히 하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더라고요." ⓒ EMK뮤지컬컴퍼니
그러나 그 꿈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는 문서에 고심 끝에 사인하고 새 시대를 그렸지만 프락치에 의해 황가에 들통났다. 황태자 지위를 박탈당하며 루돌프는 위기에 몰린다. 베체라 가문을 향한 압박도 가중됐다. 스테파니와 이혼하고 마리와 함께 살고자 했던 꿈마저 요원해졌다. 루돌프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을 법도 하다.
"루돌프의 범국민적, 대민적 정책이 실패한 것도 있지만, 아버지와 하나 되지 못한 슬픔이 굉장히 크게 느껴져요. 루돌프는 국민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설득시키려는 게 당연한 순서였을 거예요. 아버지와 하나 되어서, 올바른 세상을 하나 된 목표를 가지고 나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고민이 근원적으로 있죠. 마지막에 서류를 불태우는 장면에서도, 나의 사상이 아버지에게 결국 이해받지 못했고, 나는 아버지와 끝까지 하나 되지 못했다는 마음이 굉장히 큰 것 같아요.
모순적이긴 하지만, 익명으로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아요. 최소한 제가 봤을 땐, 루돌프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는 누구도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 나에게 가장 큰 거인처럼 보였고, 위대해 보였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계속 점점 변해가고, 주변 제국들에 너무 발맞춰나가려는 모습이 안타까웠을 뿐이죠. 심지어 자신을 감시하는 빌리굿도 미워하지 않았을 거예요. 진심으로 미워했다면 스케이트장에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저 사람도 나만큼 복잡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이 지시를 받고 나를 감시하겠구나'하는 공감과 이해 속에 있었던 사람인 것 같아요.
만약 진짜로 아버지를 미워했다면, 충분히 황태자의 권위를 활용해 다른 일을 도모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루돌프가 정치를 할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 제 꿈이 국회의원이었어요. 국회의원이 되면 모두를 다 잘 살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런데 살면서 보니까, 정치란 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또 다른 것 같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루돌프도 정치가에 맞는 인물상은 아니지 않았나. 다만 그저 사람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잘 되기를 바랐던…."
▲ 열심히 하는 카이 "가끔 저희 회사 대표님이 ‘야, 너무 열심히 하지 마. 지쳐. 무대예술이라는 게 열심히 한다고만 되는 건 아니야’라고도 하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100% 이해가 가요. 다만, 제가 열심히 한다는 게, 노동적인 시간도 있지만, 정신적인 시간도 있거든요. 계속 그 작품과 대화하고, 캐릭터와 대화하고. 그게, 정답이 아닐지언정, 저는 배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열심히 하는 것." ⓒ EMK뮤지컬컴퍼니
기차역에서 다시 만난 연인. 누구도 미워할 수 없던 루돌프는 황가를 향한 다른 종류의 저항을 선택하는 대신 마리와 함께 마이얼링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침대 위에서 행복한 한 때를 보낸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없을 것 같을 때, 그 최고조의 순간에 그들은 각자의 삶을 이 절정에서 멈추고자 한다. 좌절과 비극으로 얼룩진 도피라기엔, 지나치게 밝고, 희망적이다. 마치 '달콤한 소금'처럼, 형용모순인 것 같은 이 결론. 결국 이루지 못하고 끝으로 치달은 이 결론이 아쉽지는 않을까.
"한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기까지는 상당한 갈등과 공포가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과 열망이 그 공포보다 더 컸기 때문에 했던 결정이라고 믿어요. 저는 (루돌프와 마리의 선택이) 충분히 납득이 가요. 저는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고 평소에도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아쉬운 결말이거나,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평상시에도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해요. 나랑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생각하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오류라고 믿거든요.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그 사람(루돌프)에게서는 가장 숭고한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믿어요. 어떤 면에서는 만족스럽기까지 해요. 저에게 주어진 가장 최고의 것을 선택한 게 죽음이라고 보고, 죽음으로 귀결하면서 이 캐릭터의 모든 걸 다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요.
이 극을 처음 보신 분들은, 침대에서 단란하게 끝이 났기 때문에, 죽을 걸 몰랐대요. 제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저도 초연 때 마지막에 '빵'하고 총소리가 나서 '으허어억'하고 봤거든요. 처음엔 저도 극이 끝나고 나왔는데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이번에 첫 공연을 하고 커튼콜을 하러 나오는데 못 웃겠더라고요. 그래서 되게 슬픈 마음을 안고 나와서 인사했는데, 연출께 지적을 받았어요. '사람들 다 실의에 빠진 채 집에 보낼 셈이냐. 팬들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보내주라'라고. 그래서 지금은 최대한 노력한 끝에 웃음을 되찾았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들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이 생으로서는 마감을 한 거지만,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렇게 죽을 걸 어디로 도망가지'라는 비극적인 마음을 안고 가시기보다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을 했구나', '정말 좋은 곳으로 함께 떠났겠구나'하는 그런 '찬란한 슬픔'을 느끼시고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들에게는 최소한 그랬겠죠.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가 있어요. 봄이 가는 슬픔에 대해 노래한 시인데, 봄이 가고 여름이 가는 그 순간이 너무 슬프다는 감정인데도, (중의적인 표현이라, 일제 강점기를 그린 시이기도 해요) 따뜻한 봄, 여름이 오려는 그 찰나에 나른해지는 기운이, 참 찬란하고 아름다우면서 슬픈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을 참 좋아해요. 물론 저희 작품은 겨울을 표현하고 있지만, 나가시는 분들이, 그냥 슬픔이 아니라 찬란한 슬픔을 안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무대를 사랑하는 배우
▲ 카이의 '본진'은 류정한? “(웃음) 제가요? 아니요. 그거 약간 오해에요. 제가 다른 데서도 말씀 드렸는데, 사실 (류)정한이 형이랑 사석에서 둘이 만나는 적도 별로 없고, 따로 약속을 해서 밥을 먹거나 술을 먹는 것도 없어요. 실명을 거론할 수는 없지만, 저보다 훨씬 더 형 좋아하는 배우들 많아요!
물론, 저는 당연히 정한이 형 너무 좋아하고, 배우로서도 높이 평가하고. 또 대학 선배이시거든요.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서, 저런 길을 걸어가기까지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지 조금은 알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참 존경해요. 제가 중요한 문제는 형하고 많이 상의하는 편이에요. 제가 작품 들어갈 때나, 혹은 형님하시는 작품에 대해서 제가 전화를 드리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계속 형이랑 같은 무대 했으면 좋겠어요. 오페라계의 플라시도 도밍고처럼, 형이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계속 나와서 돈키호테를 외쳐줬으면! 그런 배우가 됐으면 좋겠고요. 음, 류정한은 사랑이다?” ⓒ EMK뮤지컬컴퍼니
예전에 연극 <메디아>를 보러 갔을 때, 그가 공연이 끝난 후 MD부스에서 줄을 서서 프로그램북을 사 가는 것을 보았다. "제가 프로그램 북을 돈 주고 산다는 건, 진짜 그 작품에 꽂혔다는 것"이라는 그. 그 자신이 공연을 좋아하는 팬이자 관객이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을 고려할 줄 알고, 그런 넓은 시야가 카이를 더 좋은 배우로 만드는 게 아닐까. 제2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시상식 때, 최고의 관객상 수상 발표 순간 객석에서 홀로 일어서 어딘가에 앉아있을 관객에게 박수치는 모습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인터뷰 중에도 무대를 향한 애정을 끊임없이 드러냈다. 이토록 무대를 사랑하는 그의 목표가 궁금했다.
"무대 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동일선상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커튼콜 때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제가 주인공이라고 여기지 않거든요. 저는 제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제 무게감이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든요. 책임감은 더 있지만요. 더 많은 부분을 이끌어가야 하니까 '오늘 나의 컨디션과 흐름에 따라 다른 사람이 지장을 받게 할 수 없다'는 목표의식이 있죠. 배우는 결국 선택받은 직업이잖아요. 제가 매니저에게 자주하는 말이, '물 흐르는 대로 둬라'라고 하거든요. 억지로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좋은 결과를 낳거나, 완성된 자아에 접근하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결국 저 사람이 필요하고, 저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표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그게 또 요새 고민 중 하나에요. 예전에는 '어떤 작품을 하고 싶다', 혹은 '나도 누구처럼 대단한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살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그게 신의 영역이더라고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캐릭터와 충분히 상의하고, 오늘의 무대에 충실하고, 내일의 무대를 준비하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곰곰이 자문했어요. '내가 시간이 지나면서 혹시 배우로서의 열의가 떨어졌나?' '이러다가 슬럼프가 오는 건 아닐까?' 그래서 주변 선배님들께 자문도 구했죠. 제가 저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한 편이거든요, 그런데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냥, 뮤지컬 배우가, 오늘의 연기에 대해서 말고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느냐는 결론이 나왔어요. 지금 이 순간의 연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목표를 지우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배우. "저는 뮤지컬 배우이니까, 평생 무대 할 겁니다"라고 밝게 웃어 보인다. "관객들의 사랑에 목마르다"라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의 2018년 차기작 중에는 '연극 배우' 카이를 오랜만에 다시 볼 수도 있는 무대도 포함될 것 같다.
"물론, 나쁜 의도는 결코 아니시겠지만, 그런 말씀을 하는 분이 간혹 계세요. TV나 드라마, 영화 같은 것을 하다가 연극으로 와서 재정비를 하신다고요. 저는 그게 조금은 교만한 생각인 것 같아요. 공연은 그렇게 휴식하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장소거든요. 대극장이냐 소극장이냐가 위냐 아래냐를 의미하는 게 아니잖아요. 극장의 크기에 따라 적은 사람 혹은 많은 사람 앞에 나선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생존 현장에 제가 발을 들여놓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강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직 연극을 하기엔 부족한 것도 있고, 경험도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열망이 매우 큰 만큼, 발을 들여놓으면서도 더 큰 무게감이 느껴져요.
다지고 다져진 연극배우님들 뵈면 너무 존경스럽고, 너무 배우고 싶은 열망이 커요. 연극 <레드> 했을 때, 굉장히 큰 터닝 포인트였거든요. 선생님들이랑 할 수 있다면, 작은 역할이라도 꼭 시켜달라고 해요. 아마 멀지 않은 시기에, 대학로에서 뵐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이 개인적으로 소극장을 느껴보고 싶은 시기기도 해요, 특히 연극을 통해서요. 불과 1~2년 전의 카이와 저는 저 스스로 평가하기에 무대 위의 느낌이 많이 다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