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라그나로크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제는 몇 편이 나왔는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또 한 편의 마블 스튜디오 영화가 스크린을 휘젓고 있다. 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흥행 순위 10위에 이름을 올린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이야기다. 이 영화는 마블이 내놓은 메가 히트 시리즈 <어벤져스>의 일원, 토르와 헐크를 내세워 가을 남자 마동석의 <범죄도시> <부라더>를 밀어냈다. 뉴질랜드 출신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첫 할리우드 연출작으로 흥행 순항 중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마블 제작 영화의 최대 매력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캐릭터에 있다. <아이언맨> <어벤져스> 이전까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마블 영화가 줄줄이 흥행대박을 이룬 것도 이때문이다. '아이언맨'과 함께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마블 코믹스에 기반을 둔 영화들이 이루는 세계관)를 공유하는 캐릭터들, 그러니까 토르와 헐크, 캡틴 아메리카, 심지어는 앤트맨과 닥터 스트레인지, 데드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캐릭터들까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다.

<어벤져스>의 성공 이후 안착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 <앤트맨> <닥터 스트레인지> <데드풀>에서 알 수 있듯 마블 시리즈의 흥행은 세계관과 캐릭터, 마블이란 브랜드에 힘입은 바 크다.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특징은 더욱 강화되고 있어 마블 영화의 불패공식은 더욱 굳건해질 듯하다.

확장하는 세계관, 깊어지는 캐릭터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분)와 그를 돕는 용사들. 왼쪽부터 헐크(루 페리그노 목소리), 토르, 발키리(테사 톰슨 분), 로키(톰 히들스턴 분).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분)와 그를 돕는 용사들. 왼쪽부터 헐크(루 페리그노 목소리), 토르, 발키리(테사 톰슨 분), 로키(톰 히들스턴 분).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시리즈가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세계관은 확장되며 캐릭터는 깊어진다. 한 번 마블 영화를 본 관객은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시리즈를 찾는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한 번 등장한 캐릭터 '블랙 팬서'는 팬들의 지지를 얻어 영화 <블랙 팬서>로 탄생했다. 내년 2월 개봉 예정인 <블랙 팬서>는 유명 감독, 스타 배우 없이 제작에 돌입해 비용을 절감하는 모양새지만 상당수 팬은 벌써 이 영화를 내년 최대 기대작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흑인 히어로인데다 감독과 배우들까지 흑인이 다수 참여해 '블랙마블' 영화로 불린다. 그러나 MCU 흑인 캐릭터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배우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닉 퓨리 캐릭터를 배제해 논란을 사기도 했다.

마블 스튜디오는 새로운 히어로 영화를 제작할 때 유명 감독과 배우를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 앞서 이안, 케네스 브래너, 조 존스톤 등 이름난 감독을 초빙해 <헐크> <토르: 천둥의 신> <퍼스트 어벤져>를 제작했지만 흥행에 참패했기 때문. 이들 시리즈는 <아이언맨>의 성공 이후 감독이 모두 교체됐고 <헐크>의 경우엔 리부트란 이름으로 아예 배우와 이야기까지 새로 꾸렸다. 앞서 마블 코믹스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퍼니셔> <데어데블> <엘렉트라> <고스트 라이더> 등이 모두 실패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블은 유명 감독의 기용을 통해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실패하면서 마블은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마블의 성공은 순간이었다. 마블 코믹스의 인기를 스크린으로 옮기고자 한 마블의 야욕은 2008년 <아이언맨>으로 처음 꽃을 피웠다. 마블은 한 편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2012년 세계관을 확립하는 영화 <어벤져스>를 탄생시키며 MCU를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후 5년 동안 마블은 할리우드를 놀라게 하는 흥행작을 줄줄이 내놓으며 2000년대 들어 가장 성공한 영화제작사로 자리 잡았다.

무명 감독으로 천문학적 수익을 뽑는다고?

 영화는 인기 있는 마블 캐릭터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중심된
 이야기가 관계 없이 5분여 간 등장시켜 관객에게 매력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영화는 인기 있는 마블 캐릭터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중심된 이야기가 관계 없이 5분여 간 등장시켜 관객에게 매력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눈에 띄는 건 마블 영화 감독들이 연출을 맡았을 당시 대부분 무명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DC코믹스의 영화화를 전담하는 워너 브라더스가 <배트맨> 시리즈(<다크 나이트>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수퍼맨> 시리즈(<수퍼맨 리턴즈> <맨 오브 스틸>)를 브라이언 싱어와 잭 스나이더에게 맡긴 것과 대조적이다. 마블은 캐릭터와 세계관을 우선하고 감독의 재량은 현장 연출에 한정 지으며 캐릭터가 관객에게 호감을 얻는 데 집중했다. 전략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내놓는 작품마다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일부 관객은 마블 영화가 모두 같은 색깔을 띠고 있다며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마블 영화 상당수에선 이미 개별 영화만의 특별한 장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캐릭터와 세계관만 있고 이야기는 과거의 영웅 전설이 답습된다는 인상도 든다. <아이언맨> 이후 열일곱 번째 마블 히어로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아래 <토르>)가 그 대표 격이다.

<토르>는 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선은 악을 이기고, 형제는 화해하며, 사람이 영토보다 소중하다는 것. 영화 속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분)는 왕국을 빼앗으려 하는 누나이자 죽음의 여신 헬라(케이트 블란쳇 분)를 상대로 싸운다. 지난 시리즈에서 그를 괴롭혀온 동생 로키(톰 히들스턴 분)까지 힘을 보태지만 토르는 끝내 헬라를 이겨내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토르를 패자로 남겨두지 않는다. 영화의 끝에서 그는 자신에게 감춰진 천둥의 힘을 깨닫고, 아스가르드의 백성을 구하며, 아스가르드에 괴물 수르트를 소환해 헬라가 왕국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한다. 물리적인 왕국 아스가르드를 잃었지만 백성을 구해 지구로 향하는 그는 이 전쟁의 승자로 기록된다. <삼국지> 속 유명한 장면, 유비가 18만 백성을 데리고 신야를 떠나 강하로 터전을 옮기던 선택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위대한 제국도 작은 균열로부터 무너진다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분)와 헐크(루 페리그노 목소리)의 대결. 영화는 어벤져스 최강자로 꼽히는 두 캐릭터의 대결이란 볼거리로 관객에 매력을 발산한다.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분)와 헐크(루 페리그노 목소리)의 대결. 영화는 어벤져스 최강자로 꼽히는 두 캐릭터의 대결이란 볼거리로 관객에 매력을 발산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러한 요소들은 <토르>가 오래된 신화나 동화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토르는 너무나 익숙한 영웅이다. 스스로 왕국을 물려받을 적자라 생각했으나 온갖 역경을 겪고 이겨낸 끝에 아스가르드의 왕으로 인정받는다. 영화를 관통하는 "백성이 곧 아스가르드"라는 대사는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흔한 깨달음이다. 죽음의 여신 헬라의 강함이나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력이야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지만 그녀가 지속가능하지 않은 악행을 거듭하는 이유는 설득력 있게 드러나지 않는다. 요컨대 <토르>에는 <토르>만의 새로움이 없다.

<토르>에 대한 평에 '그냥 마블 영화'라는 표현이 따르는 이유다. 영웅이 역경을 극복하고 자기를 증명하는 성장기이자 철없는 왕자가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는 대관식의 기본공식을 충실히 따르지만 이 영화만의 차별점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여전히 유효하긴 하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자기복제한 듯 보이는 캐릭터와 <원더우먼>을 참고한 듯한 액션도 익숙하다.

<아이언맨>은 첨단의 기술과 방황하는 주인공,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선을 행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캐릭터로 성공을 거머쥐었다. <어벤져스>는 각 시리즈의 주인공이 될 만한 캐릭터를 한데 모아 이전엔 상상만 했던 그림을 관객 앞에 펼쳐 보였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홍콩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맨손 액션을 접목해 기록할 만한 성취를 거뒀다.

마블의 브랜드는 여전히 빛나고 캐릭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아마도 다음 영화도, 그다음 영화도 흥행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두 시간이 넘는 영화에서 단 하나의 승부수도 찾을 수 없었다는 건 충격적이다. 기억해야 한다.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도 작은 균열로부터 무너졌음을.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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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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