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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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직업엔 귀천이 없다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더 많다. 삶은 개인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세상의 눈초리에 자신을 숨기기도 한다. 영화 <긴 머리 그녀들의 밤외출>은 이 두 가지 전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픈 영화다. 필리핀 마닐라의 유흥가 부르고스에서 여행객들에게 성을 판매하는 트랜스젠더 여성 튜즈데이, 아만다, 바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세 사람은 자신들이 선택한 새로운 삶에 대해 스스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지만 세상의 편견과 비난 앞에 두려워한다. 이들에게도 꿈이 있다. 새로운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찾고자 하는 튜즈데이, 가족과 지인들이 의지하고 동경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아만다 그리고 어떻게든 큰 돈을 모아 성공하길 바라는 바비.

02.

제라르도 칼라구이 감독은 그들의 삶을 유흥가의 밤거리에 가져다 놓으며 왜 세 사람이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꿈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동일한 상황에 놓인 이들의 삶이 실제로 어떤지 생각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들의 의지나 믿음과 달리 외부에서 구조화된 부조리에 의해 판단되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걸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선택한 직업적 수단과 쏟아지는 시선을 회피하는 방식이 객관적으로 옳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떳떳하지 못한 게 단순히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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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영화 속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세 사람은 각각 문제점을 갖고 있다. 튜즈데이는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럴 수 없는 환경 속에 자신을 방치하며 스스로를 외면한다. 아만다는 마닐라에서의 실제 모습을 가족들에게 비밀로 한 채 길거리에서 번 돈으로 가족의 생계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허구의 삶을 산다. 바비의 경우 조금 더 심각하다. 마약을 운반하는 일을 도우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자 하는 것. 물론 필리핀에서 마약 관련 범죄는 중범죄에 속한다. 이들의 삶이 문제인 이유는 단순히 음지에서 일어나거나 거짓으로 점철돼 있기 때문은 아니다. 삶을 지속하는 주체인 본인 스스로가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개인의 행위는 무엇을 통해 평가되나? 수단과 목적 성취의 관계에서 정당성이란 누가 부여하는가?

04.

같은 맥락에서 바비가 연루된 한국인 재원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면밀히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재원이라는 인물은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을 대상으로 갈취와 폭력을 일삼고 마약 관련 사업에도 연루된, 한마디로 질이 좋지 않은 인물이다. 실제로 필리핀에서 재원 같은 한국인들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현실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라르도 칼라구이 감독은 이를 결코 확대해석하진 않고 있다. 재원의 그릇된 행위를 개인의 문제로 한정하면서 한국인 전체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피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영화가 특정 지점을 통해 전체를 일반화하고 적당한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나 충분히 그럴만한 소재 앞에서도 냉철한 시각으로 이를 분리하는 연출은 이 영화의 장점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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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대로 외부의 부당한 시선과 온당치 못한 행위들도 주인공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요소다. 그들의 직업을 미천한 것으로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 자신의 아들 세례식에 대모로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아만다를 다짜고짜 추행하기 시작하는 남자, 지불한 대가만큼의 만족을 얻지 못했다며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폭력과 추행의 영역뿐만 아니라 은행에 다녀야만 인정받을 수 있고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는 사회 시스템의 부재 역시 이들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장한다. 폭력에서 겨우 벗어났으면서도 8만 페소(약 170만원)를 지급하겠다는 말에 다시 재원에게로 돌아가는-심지어 그곳은 운전기사들도 가기를 꺼려하는 슬럼가 골목이다-바비의 모습은 영화의 그 어떤 장면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06.

일반 관객들에게 이 작품의 소재가 익숙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최근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내에서 수용되는 범위는 제한적이다. <긴 머리 그녀들의 밤외출>은 성소수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단순히 그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개인의 선택과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선택과 수단의 정당성에 대해 고민하게 하며 마지막으로는 제한된 부분을 확대해 일반화하는 일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느끼게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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