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봉춘세탁소가 영화 <공범자들>을 패러디해 만든 <파업자들>
파업자들 화면캡처
예전 수습기자 시절 달동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기억한다. 허름한 술집 안에서 소주 값 3천 원 때문에 칼부림이 나고 사람이 죽었다. 지난 몇 년 우리의 투쟁은 그렇게 사소하고, 관심 받지 못하고, 별 볼일 없이 처절하기만 한 몸부림이었다. 수치스러워서 세상이 알아주길 기대할 수조차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그날 밤엔 최악의 보도가 나갔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왜 그런 곳에 남아 있냐고. 떳떳한 기자라면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정상적인 보도를 하는 곳으로 진작 옮겨가야 했던 것 아니냐고. 사실 불러주는 곳도, 능력도 없었던 탓이 크긴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우리가 함께 지탱해 온 돌덩어리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는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노역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벌을 받는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바위는 다시 떨어지니, 참 무의미한 일이다.
이젠 아무도 기억 못하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네 번의 파업 이후 남은 MBC 구성원들은 패배의 대가로 각자의 마이너스통장 빚더미와 사측이 제기한 195억 원이란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소송. 그리고 해직된 동료들이 언젠간 돌아와야 할 MBC를 최대한 원래의 모습대로 지켜내야 한다는 버거운 짐을 짊어지게 됐다. 2012년 파업의 마지막 구호는 '질기고, 독하고, 당당하게'였다. 비록 당당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질기고, 독하게들 버텨 왔다. 스스로 의미 없는 일이라고 좌절할 때도 많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바위 뒤에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내가 사라지면 남은 이들의 어깨 위로 그만큼의 무게가 더 쏟아질 거라는 걸 알았다. 스케이트장 같은 유배지에서 나보다 수백 배 더 큰 모욕을 참고 견뎌왔던 선배들도 어쩌면 같은 심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승리하진 못했지만, 그래서 참 부끄럽지만, 그래도 더 큰 파국을 막기 위해 끝까지 버텨보자고 서로를 위로했다.
MBC 내부의 저항을 알리고 싶었다이 길고, 무겁고, 비참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취재 현장과 인터넷 상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난, 냉소, 그리고 이젠 욕할 가치조차 없다는 무관심에 정작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공범자들'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는 한줌 맹신자들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만족했으니까. 부끄러움과 좌절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외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울림을 얻기엔 언제나 미약했다. 구성원들은 연이어 기고를 쓰고 시위를 하고 성명을 냈지만 관심을 받지 못했다. 조금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마침 잘 하지는 못해도 좋아하는 소재가 있었다. (소위 '인생의 흑역사'라 불러야 할) 대학생을 빙자한 백수 시절, 고스트라이터 흉내 내며 장난처럼 만들던 패러디물 제작이었다.
히틀러의 최후를 다룬 영화 <몰락>의 자막을 회사 상황에 맞춰 패러디해 개인 페이스북 계정과 즐겨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 두어 곳에 올렸다. 웃으라고 만든 자막이지만, 만들면서 한 번도 웃지 못했다. 멀리서 볼 때의 희극은 사실 당사자에게 비극이니까. 동료들은 걱정하며 글을 내리라고 했다. 징계 통보 잉크도 안 말랐는데 이러면 정말 큰일 난다며 다들 염려했다. 솔직히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 말처럼 차라리 큰일이 날만큼 많이들 봤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바로 다음날 선배 김민식 PD의 "김장겸은 물러나라!"는 외침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조용히 묻혔을 내 패러디물도 덕분에 덩달아 입소문을 타고 이곳저곳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사흘도 안 돼 조회 수가 5만 명을 넘어섰고, 내가 올린 적 없는 커뮤니티에 'MBC 사장실 근황'이란 제목으로 영상이 떠돌아다녔다. 비록 경박한 B급 개그물일지는 몰라도 MBC에 대한 기대를 접고, 관심을 거둔 지 오래인 사람들에게 언론장악의 폐해와 방송 적폐들의 실체를 알릴 수 있겠다는 희망이 그때 처음 생겼다. 기술도, 재주도, 유머 센스도 없다보니 한 달 동안 매일 퇴근하고 새벽까지 이런 저런 괴상한 실패작들만 혼자 만들다가, 결국 비슷한 고민을 하던 유능한 동료들의 능력에 기대기로 하고 본격적인 작당모의를 시작했다. 그렇게 유배자와 징계자 다섯 명이 모여 세탁소 간판을 처음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