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커터>에서 문가영은 존재차체로 상큼한 고교생 은영 역을 소화했다. 어두웠던 이야기인 만큼 그는 현장에서 "청량감을 주고 싶어 일부러 에너지를 끌어올려 스태프를 대할 정도"로 영화에 열정적이었다. ⓒ 이정민
영화 <커터>의 원래 제목은 <컷 허>(Cut Her)였다.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를 상징하는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이 작품 속 여성 캐릭터는 중요하다. 카메라의 시선은 가해자인 두 남자 고교생 세준(최태준 분)과 윤재(김시후 분)를 따라가지만, 소녀 즉 은영(문가영 분)을 잊어선 안된다.
어두운 정서가 가득한 설정이었기에 문가영(20)은 "청량감을 주고 싶었고, 현장에 있는 동안 만큼은 다른 분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23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영화 속 모습만큼 당차고 밝았다.
피해자 여성을 품다
▲ 영화 <커터>의 한 장면. 이야기 초반 밝은 모습을 보이던 은영(문가영 분)에게 상급생 세준(최태준 분)이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한다. ⓒ 스톰픽쳐스코리아
교복과 체육복을 입은 채 좋아하는 상급생에게 서슴없이 마음을 드러내는 은영을 두고 문가영은 "요즘엔 보기 힘든 맑은 캐릭터"로 이해했다.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세준의 어떤 모습이 그렇게 좋았을까. 이야기가 흐를수록 그리고 어둠의 손길이 은영에게 다가올수록 도리어 그의 밝은 모습이 대비돼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안 그래도 그 마지막 장면으로 촬영 전 감독님에게 상의 드리러 갔는데 제가 말 꺼내기도 전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엄청나게 배려를 받았습니다. 문제의 장면 때문에 영화 출연을 고민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어떻게 은영의 아픔을 풀어야 할까 걱정하고 있었어요. 영화 포스터엔 고등학생 충격 살인 사건이라고 홍보 문구가 적혀있지만, 아이들 시선으로 각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봐 주시면 훨씬 영화를 다양하게 이해하실 거예요.
은영이란 아이는 순수하고 맑지만, 그의 과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요. 가장 아쉬운 부분이긴 한데요. 저 스스로는 은영을 많은 사연이 있는 아이라고 여겼어요. 혼자 있으면 아마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친구일 거예요. 겉으로 밝아 보이는 사람일수록 속은 깊고 고민이 많을 수 있거든요."
영화를 통해 문가영은 "지고지순한 감정에 대해 배웠"다. 누군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연기하며 깨달은 셈이다. 외모와 달리 지인들에겐 "나이보다 성숙하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생각이 깊은 그는 "영화를 찍으며 앞뒤 재지 않고 마음껏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었다"며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현장형 배우
▲ 평소 일로 받는 스트레스를 그는 일로 푸는 식이다. "혼자 있으면 괜시리 고민만 많아질까봐 여기저기 할 일을 찾는다"고 전했다. 스무살의 당찬 기운을 문가영은 그대로 품고 있었다. ⓒ 이정민
문가영은 전형적인 현장형 배우다. 갓 스물을 넘은 나이지만, 아역 때부터 연기해온 탓에 현장 분위기에 잘 적응하고 빠르게 몰입할 줄 안다. "일하는 동안만큼은 에너지를 마구 나눠주자는 주의"라며 웃는 모습에서 자기 일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10년 전 삼촌들이 장난삼아 넣은 프로필이 한 학습지 회사에 뽑히면서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치곤 매우 자연스럽게 자신의 길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였다.
독일의 작은 도시 카를스루에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문가영은 유년기를 독일에서 보냈다. 물리학도인 아버지와 피아노 전공인 어머니는 "연기를 하더라도 학업만큼은 뒤지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했"다. 본인 역시 그 지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일까. 문가영은 범죄심리학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다. "나중에 이와 관련한 작품에 꼭 출연하고 싶다"는 포부까지 덧붙일 정도.
"학창 시절엔 수업을 놓친다 치면 방과후교실이나 동아리 모임이라도 갔어요. 낮엔 연기하고 밤엔 아버지가 과외를 해주시기도 했고요. 솔직히 전 행운이죠. 하고 싶은 걸 일찍 찾았고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요. 연기를 시작했을 당시엔 한국말도 제대로 못 했거든요. 현장에서 엄마가 귓속말로 통역해주시기도 했어요. 그때는 카메라나 주변 시선도 의식 안 하고 마치 현장이 놀이터인양 재밌게 했죠.
그러다 언제부턴가 연기를 바라보는 제 시선이 달라졌어요. 스무 살 넘으면서 막연하게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하던 게 좀 더 신중한 마음으로 바뀌었어요. <커터> 전까지 제가 교복 입는 역을 많이 했고 어서 성인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교복을 입고 안 입고가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준비가 되어있는 게 중요한 거죠."
원동력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기에 나이에 비해 그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 또한 성숙한 편이었다. "일로 받은 스트레스는 다른 일로 푸는 편"이라며 나름의 해소법도 전했다. 여기에 최근까지 문가영은 기타를 배우고 있었고, 라틴어 공부 또한 기웃거리고 있었다. 신문 기사를 자주 본다는 말에 혹시나 해서 물으니 고등학생 때 교내 신문부에서 칼럼도 여러 개 썼단다.
"이게 다 절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거 같아요. 사실 사람들이 절 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막 힘을 전하곤 했거든요. 누군가에게 쉼터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요. 이제 저도 스스로 채우는 무언가를 찾아야 할 때인 거 같아요. 기타는 음…. 에프 코드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중단했네요(웃음).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보여드릴게요.
입시를 준비할 때(문가영은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에 재학 중) 사실 아예 다른 분야를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범죄심리학으로 유명하신 표창원 교수님 영상도 많이 찾아보곤 했거든요. 범죄수사 드라마도 많이 보고. 그러다 제가 연기 이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는 생각에 지금의 과를 정했죠. 연극 무대에는 꼭 오르고 싶어요. 아직은 2학년이라 연장을 들고 돌아다니며 무대를 만들고 있지만요(웃음)."
그의 목표 중 하나는 여성 캐릭터로서 한 작품을 온전히 책임질 배우가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볼 때마다 여전히 여배우로서 설 자리가 넓진 않은 것 같다"고 말하던 문가영은 분명 흐름을 읽을 눈을 갖고 있었다. 기회가 찾아올 때 제대로 해낼 수 있도록 그는 스스로 담금질 중이었다.
▲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 문가영은 타인의 말 듣기를 좋아한다.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다"며 그는 "스스로를 채울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를 찾는 중"이라 고백하기도 했다. 나이에 비해 분명 생각이 깊어 보였다. ⓒ 이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