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대중문화 중에서도 연극과 뮤지컬은 동성애에 가장 개방적이면서 상업적으로 잘 활용하는 장르이다. 동성애 코드를 활용한 극의 메시지는 대개 비슷하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 그들의 사랑도 똑같이 사랑이라는 것, 그러니 그들에게 어떤 편견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

<거미여인의 키스> 역시 두 남자의 사랑, 두 사람의 평범함을 외친다. 하지만 이 연극은 조금 다르다. 두 동성애자가 편견과 무시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격리된 공간에서 성적 지향이 다른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다.

폐쇄된 좁은 공간에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만났다

 지난 20일, 서울 대학로 신연아트홀 <거미여인의 키스> 커튼콜 및 관객과의 대화.

▲ 김선호의 발렌틴 지난 20일, 서울 대학로 신연아트홀 <거미여인의 키스> 커튼콜에서 김선호 배우가 울상을 짓고 있다. 극의 마지막, 해설을 통해 설명되는 발렌틴의 마지막은 애잔함을 낳는다. 고문을 받던 중 모르핀을 주사를 맞고 꿈을 꾸는 그. 그 꿈에서 그는 거미여인을 만나게 된다. ⓒ 곽우신


 지난 20일, 서울 대학로 신연아트홀 <거미여인의 키스> 커튼콜 및 관객과의 대화.

▲ 김호영 몰리나 지난 20일, 서울 대학로 신연아트홀에서 진행된 <거미여인의 키스> 커튼콜에서 김호영 배우가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몰리나는 발렌틴을 성심성의껏 돌본다. 그 동기에는 '약속된' 대가도 작용했지만, 점차 그는 발렌틴이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좋아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동시에 품는다. ⓒ 곽우신


<거미여인의 키스>는 남자 배우 둘의 대사로만 진행된다. 좁은 감옥에 갇힌 두 죄수, 발렌틴과 몰리나. 발렌틴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에 부풀어 있는 정치범이다. 몰리나는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잡혀온 성 소수자이다. 성 취향 뿐 아니라 두 사람은 가치관에서도 전혀 다르다. 발렌틴은 극단적인 이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이다. 반면 몰리나는 감성을 중시하며 동시에 자신과 어머니의 삶이 사회보다 중요한 개인주의자이다.

몰리나 "그냥 좀 오늘을 즐겨!"
발렌틴 "오늘을 즐기라고? 나는 그런 개 같은 말 안 믿어. 어차피 그런 파라다이스는 우리에게 오지 않았으니까."

이처럼 이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지만, 동시에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다. 발렌틴은 강인한 의지력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하는, 영웅 서사에서 흔히 그려지는 위인이 아니다. 감옥 밖의 애인을 안고 싶은 욕망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복통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바지에 분비물을 묻히기도 한다. 몰리나는 다정하고 상대를 위할 줄 알지만, 그렇다고 넓은 아량과 담대함으로 상대의 모든 거친 반응을 안는 사람은 아니다.

좁은 공간에 억지로 가둬진, 이 다르면서 같은 두 인물은 어떤 식으로든 교류할 수밖에 없다. 화를 내고, 싸우고, 토라지는 그들의 갈등과 화해가 극의 주요한 사건들이다. 낯선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며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통과의례처럼 겪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갈등. 서로의 편견을 제거하고 눈앞에 존재하는 상대 그 자체만 남았을 때, 두 사람의 차이들은 사소해지고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사소한 차이를 거두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 - 참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이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사회 내의 특정 소수자를 바라볼 때, 우리는 종종 어떤 종류의 좁은 인식틀을 가지고 상대를 가두고는 한다. 그 내재된 틀이 상대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오고 상대를 비인간화시킨다.

몰리나 "너만 괜찮다면, 날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네가 원하는 건 나도 원하는 거니까. 네가 역겹게 느끼지만 않는다면…."

역겹다? 이렇게 몰리나는 주변의 멸시에 익숙해져 있었다.

표범은 할퀴고 물어뜯지만, 거미는 외면을 그대로 놔둔다
 지난 20일, 서울 대학로 신연아트홀 <거미여인의 키스> 커튼콜 및 관객과의 대화.

▲ 미소 짓는 발렌틴 발렌틴에게 몰리나는 사회의식도 없고, 의지력도 부족해 보일뿐더러 쓸데없이 감상적인 사람이었다. 그저 감옥에서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정도의 대화 상대였지만, 점차 몰리나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몰리나라는 거미에게 물렸기 때문에. ⓒ 곽우신


 지난 20일, 서울 대학로 신연아트홀 <거미여인의 키스> 커튼콜 및 관객과의 대화.

▲ 발렌틴을 바라보는 몰리나 몰리나는 처음에 불순한 의도로 발렌틴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발렌틴에게는 순수한 이상과 그 이상을 추구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몰리나만 발렌틴을 바꾼 게 아니다. 스스로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어떻게서든 최선을 다하려는 발렌틴의 모습은, 몰리나도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 곽우신


발렌틴이 극 초반에 보였던 몰리나를 향한 태도는, 소위 '진보 진영'의 일부가 흔히 성 소수자를 대할 때의 태도와 비슷하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고 세계의 변혁을 꿈꾸는 이들 중, 정작 성 소수자를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이가 종종 있다. 성 소수자의 운동에 대해 "전선이 흐트러진다"라고 나무라거나 "같은 편 등에 칼 꽂지 마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이도 여럿이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에 반기를 든 진보가, 인간을 위한다는 진보가, 도리어 인간을 억압하는 모순 - 발렌틴이 그랬다. 발렌틴의 혁명에는 개인도, 사랑도 없었다. 특정 동지와 너무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 안되고, 감정은 중요한 순간에 계획을 망칠 여지를 만들기 때문에 절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몰리나를 만난 발렌틴은 결국 모순을 부순다.

발렌틴 "그럼 이젠 네가 나한테 약속해. 사람들이 너를 존중하게끔 한다고... 누구도 너를 이용 못하게 한다고! 약속해, 너 자신을 폄하하지 않겠다고!"

작품 내에서 몰리나는 끊임없이 표범여인에 대한 영화 이야기를 한다. 반면 발렌틴은 몰리나를 표범이 아닌 거미여인라고 표현한다. 표범과 거미는 모두 먹이사슬의 포식자이지만,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표범은 상대를 할퀴고 물어뜯지만, 거미는 상대의 외면을 있는 그대로 놔둔다.

관객과의 대화 중에, 몰리나 역의 김호영 배우는 거미의 생물학적 특성을 언급하며 거미여인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거미는 거미줄로 상대를 옭아맨 뒤 독을 주사하고, 그의 내부를 바꾼다. 거미에게 물린 대상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의 변화를 체험한다. 나아가 거미는 그 상대의 속을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내부도 변화한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둘의 캐릭터 색깔도 묘하게 섞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발렌틴은 몰리나에게 물렸다. 발렌틴은 이제 자신의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몰리나에 대한 마음을 솔직하게 받아들인다. 몰리나는 발렌틴을 물었다. 그간 사회의 방관자였던 그는 도청과 비밀경찰의 위험을 무릅쓰고 발렌틴의 메시지를 레지스탕스 조직에 전달한다. 이렇게 문 자와 물린 자 모두 변한다.

당신은 혹시 표범여인이 아닌 거미여인이 되고 싶은가. 혹시 거미가 되어 누구가를 물고 혹은 물리고 싶은가. 그럼 부디 서두르시길. 2011년 초연 이후 5년 만에 돌아온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오는 31일 재연을 끝내고 관객과 이별한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포스터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포스터. 31일까지.

▲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포스터 이 극에 출연한 어떤 배우가, 그 최소한의 '인간 존중'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태도를 보인 것은 두고두고 팬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그것이 이번 <거미여인의 키스>의 유일한 흠결이 아니었을까. 그 배우는 팬의 마음을 다시 돌리기 위해 무대 위에서 꽤 오랜 시간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악어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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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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