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 <스윙걸즈> <린다린다린다>는 최근 개봉했거나 상영중인 10대가 등장하는 일본영화다. 사실 청춘영화 속 10대는 박제된 이미지일 가능성이 크다. 청춘이 가질 수 있는 특권으로 성장통을 앓거나, 유쾌하고 발랄하게 즐기거나, 나름의 고민을 가지고 어른이 되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리거나 이제는 성인이 된 감독과 제작자들의 시선이 투영된 것이다. 특히 성에 국한시킨다면 그들은 언제나 순수해야 하며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 또한 메가폰과 검열의 가위를 든 성인들의 강박관념의 산물이다. 지난해 개봉했던 <제니주노>에 쏟아졌던 야릇한 시선들은 모두 10대의 임신이라는 소재 탓이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빨간 마후라’ 사건이 일으켰던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떠오를 것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10대들의 성을 외면하고 터부시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반면 <달빛 속삭임>(감독 시오타 아키히코)은 10대의 성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특히 주인공을 사도마조히즘적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극단에 다다른 사랑의 본질이 결국 이런 것이 아니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순수한 감정을 강조하는 낯익은 청춘물로 시작했던 영화가 서서히 질투와 번민으로 가득 찬 치정극으로 자리를 이동할 때 관객의 당혹스러움은 인물들에 대한 연민으로 변화된다. 시오타 아키히코 감독은 데뷔작임에도 능숙한 솜씨로 마조히즘적 성향을 보이는 타쿠야의 병적인 취향이 서서히 전염되어 사츠키가 사디스트로 변모해나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감정의 전염, 그것이야 말로 사랑의 본질 중 하나가 아니던가.
ⓒ 인디스토리

시골 고등학생인 타쿠야(미즈하시 켄지)는 같은 학년 사츠키(츠쿠미)를 좋아한지만 검도부에서 그녀에게 죽도로 머리를 맞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한다. 시작부터 타쿠야의 취향을 살짝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넣어 본 사물함 열쇠가 맞아 사츠키의 물건들을 갖게 된 타쿠야는 절도를 시도하고, 사진을 비롯한 잡다한 물건들을 가장 은밀한 책상 서랍에 간직한다. 사츠키에게 마음을 둔 친구 대신 그녀에게 러브레터를 전달해 준 타쿠야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호감을 고백하고 이내 두 사람은 데이트를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30분까지는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연상시킬 만큼 시골 고등학교의 고즈넉한 풍경들과 순수한 소년소녀의 데이트 장면들이 펼쳐진다. 영화가 급작스런 유턴을 하는 지점은 감기에 걸려 결석한 타쿠야의 집에 문병 온 사츠키가 자연스레 키스를 하고 섹스를 시도하면서부터다. 절정까지 가는 것을 거부한 타쿠야에게 감동한 사츠키. 하지만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자신의 물건들, 그리고 화장실의 물 내리는 소리까지 녹음한 타쿠야의 병적인 집착을 알게 되면서 사츠키는 몸서리치게 된다. 이제부터 타쿠야는 발 페티시는 물론, 사츠키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훔쳐보게 될 정도로 점점 피학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엄마에게 “나 변태인가봐”라고 농을 건네는 타쿠야는 알면서도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버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개가 되고 싶다는 타쿠야의 피학적인 감정이 사츠키에게 전이 된다는 점이다. 그를 변태라고 생각하면서도 괴롭히고, 그의 앞에서 다른 남자와 섹스하며 쾌락을 맛보는 사츠키의 변화에서 ‘이 죽일놈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염을 넘어 중독에 이르게 된다. 아키히코 감독은 영화가 시작한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직설적으로 타쿠야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의 내레이션까지 들려주면서 이런 감정들이 결국 사랑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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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엽기적인 만화로 유명한 기쿠니 마사히코의 동명 만화를 영화화한 아키히코 감독은 이 작품 이후 가출한 아버지와 호스티스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녀가 학교와 사회에서 겪는 극단적 소외감을 그린 <해충>과 사이비 종교집단에 의해 해체된 가족을 찾아 여행하는 십대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카나리아>로 10대들을 탐구한 바 있다. <달빛 속삭임>이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이후 컬트 팬들을 낳은 이유는 소년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가학과 피학적 관계라는 쇼킹함, 또 사랑의 극단이라는 만국 공통의 관심사를 탐구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피에르 빠졸리니의 <살롬, 소돔의 120일>과 같이 성을 주제로 한 고전들이 지극히 사적인 성을 통해 파시즘과 정치를 은유하지만 <달빛속삭임>은 그런 거시적인 주제에 매달리지 않는다.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타쿠야나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사츠키의 집을 가끔 비추는 것으로 해체된 일본의 가족을 반영한다고 보기에는 자칫 무리가 있다. 영화는 오히려 순수함과 사랑의 극단을 오가는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기에도 모자르기 때문이다. 직설화법으로 10대들의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것 자체로 <달빛 속삭임>은 충분히 전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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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미셸 푸코는 권위적인 사회일수록 성적 욕망은 억압받기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으로 타자인 10대와 그들의 성적 욕구를 마치 성인의 그것과 동일 선상에서 그리고 있는 <달빛 속삭임>은 생경함과 낯선 체험 그 자체지만 곱씹을수록 정체모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극히 극단적인 사랑을 순수함과 동일선상에서 표현한 이 영화의 매력은 공식적으로 시선의 주체인 18세 이상의 성인들이 그들의 사랑에 공감하면 할수록 묘한 일탈감을 맛보게 한다는 것이다. 10대의 감춰진 욕망이 영화속에서 재현됐다는 것, 그것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것으로 재현됐다는 것 만으로 <달빛 속삭임>은 권위주의에 반기를 들고 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영화가 우리나라에 소개 됐다는 것 그 자체가 놀라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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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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