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이별, 그 뒤에도>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어떤 작품은 하나의 신(Scene)만으로도 오래 기억된다. 이전에 없던 기술을 선보이며 관객의 충격을 불러일으키거나 작품 속 다른 모든 장면을 잊게 할 만큼 강하고 짙은 인상을 남기거나.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이별, 그 뒤에도>의 시작도 그런 쪽에 속한다. 떨림과 설렘, 사랑이라는 이름의 단어가 고점에 놓여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집약해 놓은 듯한 두 인물 유스케(이쿠타 토마 분)와 사에코(아리무라 카스미 분)의 모습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이야기의 출발은 그 마음을 부수고 또 부수어 잘게 뜯어낸 뒤에 그 발끝 아래에 흩어놓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을 접한 사람들에게 오프닝신이 사랑의 찬가로 기억되는 일과는 별개로 극의 서사는 사랑의 기적이 붕괴한 폐허의 자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이별, 그 뒤에도>에는 이제 막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가는 인물 사에코와 그의 남자 친구가 남기고 간 심장을 이식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카즈(사카구치 켄타로 분)의 이야기가 있다. 우연히 같은 기차를 타고 마주하게 되는 두 사람은 유스케의 심장과 커피라는 공통의 매개를 통해 조금씩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을 갖게 된다.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1)의 아리무라 카스미와 영화 <남은 인생 10년>(2022)의 사카구치 켄타로가 주연을 맡으며 국내에서도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작품.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8부작의 드라마 가운데 1부와 2부의 내용만이 공개되었다.
02.
전체 이야기의 25%에 해당하는 1화와 2화의 전개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94분 남짓한 상영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각 인물의 서사를 매우 단단히 쌓아가고자 한다는 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그가 남긴 어떤 오브젝트, 그리고 그를 통한 새로운 인연의 서사는 사실 멜로 드라마 장르에서 오래 활용되어 온 장르적 서사에 가깝다. 다만 이러한 구조의 경우 이미 정해져 있는 결말에서의 장면만을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데 반해, 이 드라마는 그런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쌓아가는 서사의 결과물로서 하나의 결말을 완성하고자 하는 느낌. 이 작품이 주는 가장 처음의 이미지다.
"내 눈앞에서 점점 멀어진다고 해도 결국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실제로 1화의 내용 전체를 통해서는 유스케와 사에코 두 사람의 서사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밀도 있게 전개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와 연인으로 관계를 발전시키기까지의 이야기가 조금의 공백도 없이 찬찬히 이어진다. 물론 2화에서 드러나게 될 카즈와 미키(나카무라 유리 분) 부부와의 작은 연결고리는 조금씩 제시된다. 세상을 떠난 유스케로부터 심장을 이식받은 카즈가 익명으로 (장기 이식 제공자 가족과 수혜자는 서로의 정보를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 편지를 보내오는 장면 등을 통해서다.
2화에서는 카즈와 미키의 이야기가 앞서 구축된 유스케와 사에코의 서사 위에 쌓이기 시작한다. 처음 장면에서 카즈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찾아온 미키가 창밖으로 불꽃놀이가 보인다고 말하는데 이때의 장면이 1화와 연결되는 식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에서 각각의 서사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쌓이고 있다는 뜻이 그 과정 동안 다른 서사를 잊혀지도록 내버려둔다는 말은 아니다. 각자의 서사가 축적되는 과정 속에서 서로 충분히 소통하며 교류되고 있으므로 8부작이라는 (영화에 비해) 긴 호흡 속에서도 이야기 간의 단절감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