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OTT 드라마 시리즈는 <오징어게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넷플릭스의 천문학적인 한국 콘텐츠 투자금이나 글로벌 OTT를 비롯한 국내 OTT 시장의 무한경쟁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징어게임> 공개 직후와 비교해 불과 몇 년 사이 넷플릭스를 제외하고 한국 OTT 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드라마 시리즈 제작 편수조차 확연히 줄었다는 게 업계 평가다.

그보다 <오징어게임>의 성공이 업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장르물에 대한 경도와 그에 따른 표현의 전형성 혹은 과도함이다. 넷플릭스가 열어젖힌 장르물의 보편화는 한국 특유의 쏠림현상과 맞물려 범죄물 또는 소재적으로 범죄와 폭력을 경유하는 드라마가 범람하는 계기가 됐다. 학교물이어도 학교 폭력물, 고등학생이 주인공이어도 고등학생 범죄물에 치우치는 맥락일 것이다.

김은숙 작가의 <더 글로리>만 놓고 보면 자명해진다. '로코의 여왕'이라 불렸던 그의 첫 번째 '19금' 넷플릭스 드라마인데, 복수극이자 범죄극이요,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다. 심지어 노출까지 불사한다. 표현 수위도 꽤 높다.

<관상>, <더 킹>, <비상선언> 한재림 감독이 연출한 <더 에이트 쇼>는 '포스트 <오징어게임>'이란 측면에서 올해 상반기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중견 영화감독이 연출했고, 거액을 놓고 벌이는 참가자들의 게임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 폭력과 범죄, 죽음을 동반한 소재들이 빈번하게 나열된다는 점에서 종종 <오징어게임>과 비교 당하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최근 종영한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이하 <노 웨이 아웃>)도 이 부류에 해당하는데 그 수위가 최근 그 어느 드라마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희대의 흉악범이 출소한 뒤 벌어지는 200억 원 현상금을 건 공개살인청부'라는 소재 하에 일반적인 폭력과 범죄는 기본이요, 강간살인, 청부살인, 청소년 납치 등 강력범죄의 향연(?)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게다가 극의 전개가 무척이나 매끈한 수작이다. 문제는 '그래서 무엇?'이란 허망한 질문만이 남는다는 것.

영화감독이 연출한 잘 빠진 범죄물

 디즈니+ 드라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
디즈니+ 드라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디즈니플러스

'대국민 살인청부, 참여하시겠습니까?'

얘기는 이렇다. 정체불명 가면남이 인터넷 방송을 이용해 대국민 살인 청부를 이어간다. 방식은 쉽다. 룰렛을 돌려서 당첨된 인물들에게 현상금을 걸고 '귀를 자른다'거나 '죽인다'는 지령을 내리는 것. 긴가민가했던 시청자들은 돈맛을 본 뒤 순식간에 현상금 사냥꾼들로 돌변하고, 급기야 이들은 13년의 형기를 마치고 막 출소한 희대의 흉악범 김국호(유재명)를 노리기 시작한다.

가상의 경기도 호산시를 배경으로 으레 그렇듯 인물들이 줄줄이 엮어 들어간다. 먼저, 빚더미에 앉아 전전긍긍하던 호산시 경찰 백중식(조진웅)은 용의자에 집에서 10억 원이 든 캐리어를 발견하고선 고민 끝에 꿀꺽해 버린다. 극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범죄극의 출발이다.

이어 가면남의 피해자이자 범죄자이며 중식이 꿀꺽한 10억 때문에 한쪽 귀가 잘린 도축업자 윤창재(이광수), 오로지 전재산을 투자한 상가 건설 재개를 위해 김국호의 변호인을 자처하며 무슨 일이든 하고마는 변호사 이상봉(김무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김국호를 호산시에서 치워내야만 하는 호산시장 안명자(염정아),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성공이 보장됐지만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와 지옥 속에 살았던 김국호의 아들 서동하(성유빈)이 얽히고 설키며 그들의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촘촘하고 빼곡하다. 이들이 엮인 인연, 아니 악연이 눈 돌릴 틈 없이 휘몰아친다. 날로 현란해지는 한국 드라마 시리즈의 편집술이 이를 뒷받침한다. 표현 수위는 범죄물이자 느와르에 걸맞게 거침이 없는 반면 드라마의 전체 톤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김국호는 세상을 조롱하고, 정치인은 닳고 닳았으며, 변호사는 법꾸라지에 다름 없다. 경찰들은 무력한데다 윤창재로부터 협박을 받는 백중식의 딜레마가 극 전반에 드리워져 있다.

김국호와 200억 원 대국민 살인 청부를 중심으로 범죄물을 가장한 군상극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기존의 인간 군상극이라 하기엔 인물의 심리보다 사건의 연쇄를 쫓는 형식에 가깝다. 사유보다 사건이 우선인데 그 전개가 몇가지 약점을 제외하곤 상당히 개연성이 높은 데다 속도가 대단히 빠르다. 8부작이란 물리적 제한 안에서 서사의 누수가 거의 없으니 가능한 전개다. 앞서 매끈하다는 표현을 쓴 건 그래서다.

<오징어게임>이나 <더 에이트 쇼>처럼 잘 나가는 영화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노 웨이 아웃>은 <스플릿>으로 장편 데뷔해 <국가 부도의 날>, <인생은 아름다워>를 거친 최국희 감독이 연출했다. 매회 주요 인물의 분량을 조절하면서도 전체 흐름을 가져가는 전개의 호흡이 출중하다. 기존 드라마와 영화적 리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흉악범의 끝판왕을 선보이는 유재명을 비롯해 조진웅, 염정아, 김무열, 이광수 등 주요 배역 누구도 빠지는 연기자가 단 한 명도 없다. 특히 부패한 정치인을 연기한 염정아는 올해의 여우조연상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아울러 후반부 깜짝 등장하는 '킬러' 미스터 스마일을 연기한 대만의 허광한 배우조차 무리가 없을 정도가 아니라 꽤나 매력적이다. 역시나 후반부를 책임지는 목사 성준우 역의 김성철이나 흉악범 아들 역의 성유빈 또한 선배들 사이에서 제 몫을 다해낸다.

영화적, 아니 서사적 활력이 철철 넘쳐 흐른다. 주제에 대해 크게 욕심을 내지 않으면서도 흥미로운 소재와 익숙할 법한 전형적인 인물들을 제대로 뒤섞은 채 서사적으로 내달린다. 물론 고비고비 꽤나 자극적인 설정들로 넘쳐나는 것은 기본이다. 또 하나의 비범한 K범죄물의 탄생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노 웨이 아웃>의 현재 위치

 디즈니+ 드라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
디즈니+ 드라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디즈니플러스

이제 한국 콘텐츠는, K 드라마는 넷플릭스 망을 타느냐 안 타느냐로 나뉜다. <노 웨이 아웃>은 U+모바일tv가 제작하고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공개됐다. 완성도나 야심, 주연들의 명성에 비해 화제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면 달랐을 터다. 한국 콘텐츠 시장의, OTT 시장의 현주소다.

OTT 시장은 영화감독들이 해보고 싶었던 장르를, 표현 수위를 마음 놓고 질러보는 무대가 됐다. 넷플릭스가 판을 키웠고, OTT 시장의 짧았던 활황이 이를 부추긴 결과다. 몇 년에 걸쳐 그 맛을 본 시청자들이 눈높이를 낮추긴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남다른 완성도를 선보인 <노 웨이 아웃>도 그 자장 아래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게 독이 될까 약이 될까. 쉽게 점칠 수 없는 문제다. 얼핏 <노 웨이 아웃>과 비슷한 소재나 표현, 인물군을 공유하는 <국민사형투표>가 SBS라는 지상파에서 방영되며 그 표현 수위나 범죄물로서의 농도가 조정된 걸 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플랫폼이나 채널에 맞게 수위는 조절될 것이다. 자극적인 소재라 할지라도 플랫폼의 개성에 맞게 조정될 것이며 그 안에서 연출자의, 제작진의 개성은 한층 중요해질 것이다. 그래야만 화제성 면에서 절대 우위를 가져가는 넷플릭스를 뛰어넘는 비넷플릭스 시리즈들이 다수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디즈니플러스의 <무빙>이 그랬듯이. <노 웨이 아웃>은 그 중간 어디에 위치할 것이다. 잘 빠진 범죄물에서도 시청자들은 사유할 만한 무엇을, 남다른 형식이나 구조 등을 기대할 테니.

반어적 의미에서, 시청 후 잘 만든 범죄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노 웨이 아웃>은 한국판 <파고> 시리즈나 한국판 테일러 세리던의 출현을 기대케 만든다. 코엔 형제가 제작에 참여한 <파고> 시즌1은 사유와 개성, 서사적 재미가 공존하는 절창의 범죄물이었고, 시즌 4까지 제작됐다.

테일러 셰리던은 지금 미국에서 제일 각광 받는 각본가이자 제작자다. <옐로우스톤>, <메이어 오브 킹스타운>, <라이어니스: 특수 전담팀>, <털사 킹> 등 근래 들어 미국에서 화제와 호평을 휩쓴 (범죄) 드라마들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가상의 호산시를 배경으로 했던 <노 웨이 아웃>처럼 한 공간을 배경으로 범죄에 얽힌 인물들과 가족들이 벌이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심리 전개에 탁월함을 보이는 기획자라 할 수 있다.

K범죄물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자극적인 소재나 표현 수위, 한국 특유의 빠른 호흡으로 승부하는 잔꾀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준비가 필요하다. <노 웨이 아웃>도 언젠가 한국판 <파고>나 테일러 셰리던급 드라마 시리즈가 도래할 날을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완성도를 자랑했으니 말이다.

 디즈니+ 드라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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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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