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이 디셈버> 스틸컷
판씨네마(주)
05.
이제 엘리자베스의 차례다. 그녀의 등장과 모종의 교감은 조로 하여금 자신이 그동안 갇혀 있던 그레이시의 껍질 자체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스스로 인내해 온 사랑, 혹은 책임에 대한 근원적 의심이라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여기에서 엘리자베스가 일으키는 조의 감정적 파동은 온전히 그를 위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이 앞으로 연기해야 할 그레이시라는 인물 원형에 더욱 가까워지고자 하는 것이고, 조는 그 과정에서 필요한 하나의 장치 정도로만 여겨진다. 그레이시가 그랬듯, 엘리자베스 역시 그를 나비로 탈피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방생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그녀는 조의 감정을 최대한 이용한 이후에 모든 것이 어른들의 사정일 뿐이라며 슬쩍 한 걸음 물러나 버린다.
조라는 인물을 활용하지 않더라도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향하는 모습에는 어딘가 전지적인 느낌이 있다. 하나의 인물에만 제한적으로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그렇다. 엘리자베스는 처음에 가족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정 부분은 그녀와 닮은 화장을 하고, 그녀가 직접 쓴 편지를 읽은 행위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후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 자신이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레이시를 자신이 생각하는 틀, 공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인물의 원형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설정한 그레이시의 모습대로 원형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이 심어놓은 영화의 깊은 고뇌와 추돌의 현장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결정지은 모양으로 인물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추동(推動)적 인물과 누군가 자신을 끌어당기고 요구하면 할수록 원래의 자리를 더욱 꼿꼿이 지키며 자신의 페르소나에 훨씬 더 집착하고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반동(反動)적 인물의 대립.
영화의 후반에 놓이게 되는 두 장면,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아들인 조지(코리 마이클 스미스 분)로부터 어린 시절의 그레이시가 오빠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듣게 되는 장면과 다시 한번 그레이시로부터 조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을 듣게 되는 장면 사이에서 엘리자베스는 그만 길을 잃고 만다.
원형의 그레이시와 자신이 완성한 그레이시 사이에서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 객관적으로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 신의 영화 촬영 현장, 마지막 테이크에 만족하는 감독에 반해 한 번 더 연기하고 싶다고 요청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으로 교환된다. 그녀는 정말, 무엇이 진짜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