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민덕희> 스틸컷
(주)쇼박스
03.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두 이야기, 보이스피싱 콜센터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나아가는 덕희와 반대로 총책 일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재민을 교차하며 전개하는 방식이다. 신의 교차 방식을 활용했던 작품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는 의미적으로 조금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각자가 처한 막다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려 나가는 두 인물의 목적지가 결국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그 교차점은 보이스피싱을 당해왔던 지난 모든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놓여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물론 서로를 향해 나아가던 두 인물이 하나의 장면에서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도 현실의 모든 문제가 금방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를 비로소 뚫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각오보다 더 대담한 용기와 결정이 필요한 법. 영화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마지막 순간까지 덕희와 재민 두 사람의 어깨를 짓누른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두 사람을 돕지 않던, 유연하지 못하고 꼿꼿하기만 했던 경찰 집단의 경직된 태도도 한몫을 한다. (실제로 영화의 모티브가 된 김성자씨 역시 처음 경찰로부터 무시와 비웃음만 받았을 뿐,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04.
개인의 실화에 기대고 있으면서 보이스 피싱이라는 범죄를 단지 한 사람만의 이야기로 국한하지 않고 넓게 대하고자 하는 태도 역시 이 영화가 가진 의미적인 부분 중 하나다. 덕희가 자신이 아닌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증인을 구하는 장면이나 재민이 자신의 제보를 구체화하기 위해 빼돌린 증거 자료 속 수많은 피해자들의 이름은 우리 모두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까지 소재로 활용되며 희화화되는 시대에서 보이스 피싱 범죄란 늙고 힘없고, 덜떨어진 사람들만 사람들만 당한다는 다소 편협하고 부정적인 시선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이는 반대편에 놓여 있는 보이스피싱 콜센터의 수많은 범죄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화는 굳이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속아 중국까지 넘어온 한국인들의 모습을 몇 차례가 보여준다. 그들 역시 달콤 살벌한 유혹에 속아 육체와 영혼을 모두 저당 잡힌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총책인 오명환(이무생 분)에 의해 칭다오의 콜센터가 정리될 때도 영문도 모른 채 제일 먼저 탑차에 실려 짐짝처럼 또 다른 콜센터로 옮겨지던 게 그들 아니었나. 관리자였던 일부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이쪽에서도 누구나 가해자를 강요받는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한다.
▲영화 <시민덕희> 스틸컷(주)쇼박스
05.
무엇보다 이 영화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덕희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러닝타임 내내 빼곡하게 채워 넣는 라미란 배우다. 초반부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재민이 자신이 속해있는 보이스피싱 무리를 제보하겠다며 다시 연락해 온 때다. 운전 중이던 트럭을 갓길에 세우고 내려선 그녀는 도움은 주지 못할 망정 매뉴얼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112 센터 담당자의 멘트에 발을 동동거리며 답답한 마음을 온몸으로 쏟아낸다. 이 장면에서 같이 발을 구른 건 나 혼자만의 일이었을까. 박 형사를 처음 만나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쏟아내는 장면에서도, 두 아이 민지와 훈이로부터 강제 분리되던 때에 울음을 삼켜내던 모습에서도 그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을 공력을 기울인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화면을 가득 채우던 그녀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나아가던 그녀의 연기 앞에 어느 누가 마음을 빼앗길 수 있지 않을 수 있을까. 곁에 머물던 다른 인물들의 자리가 선명하고 또렷하게 남을 수 있는 것 역시 덕희라는 인물이 제대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작품에 하나의 잘 완성된 상업영화 이상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실화 속 인물만큼이나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여성 캐릭터의 구현과 완성이 아닐까? 적어도 이 지점에서 그녀는 픽션을 찢고 나온다.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니 눈에선 피 눈물 나는 거야!"
06.
2016년 6월부터 8월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시민덕희>. 사실 이 작품은 코로나19의 여파로 촬영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개봉을 기다려야 했을 정도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심지어 재민 역의 배우 공명은 군입대 전에 촬영을 하고, 제대 이후에야 작품의 개봉을 맞이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기도 했을 정도. 오랜 시간 관객들을 만나지 못하고 묵혔음에도 지금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가 가진 힘이 크다는 뜻이다. 지난 2019년 영화 <선희와 슬기>로 첫 장편작을 연출했던 박영주 감독. 그녀의 첫 장편 상업 영화인 <시민덕희>는 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만하다. 취할 것은 취하고 도려내야 할 지점은 도려낼 줄 아는, 무게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제 속도를 낼 줄 아는 영화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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