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유괴범과 천재소녀 로희의 이야기가 펼쳐진 드라마 <유괴의 날>의 한 장면.
ENA
욕망의 수단인 아이
로희(유나)는 천재다. 아버지 최진태 박사는 그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연구과제인 '천재 소녀 프로젝트' 그러니까 아이의 뇌를 조작해 천재로 만드는 연구를 로희를 통해 완성해간다. 그러던 중 아내와 함께 살해당하고, 로희는 자신의 딸 희애(최은우)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접근한 명준(윤계상)에게 유괴된다. 명준은 비록 유괴범이지만 로희를 따뜻하게 대하고, 부모를 잃은 로희는 명준과 함께 도망 다니며 살인사건의 전말을 풀어간다.
그런 가운데 로희를 둘러싼 어른들의 욕망이 펼쳐진다. 최진태 박사의 연구를 도와온 모은선 박사(서재희)는 발달이 느린 자신의 딸을 위해 로희를 간절히 원한다. 로희의 비밀을 알아내 자신의 아이를 구하고픈 은선은 로희를 '인류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투자가 제이든(강영석)은 돈을 위해 로희를 필요로 한다. 로희를 조직에 넘기고 거액을 챙기는 게 그의 욕망이다. 반면, 로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어른들도 있다. 최진태 박사의 유산을 노리는 로희의 친인척들은 로희가 유괴로 인해 사망했다는 거짓 뉴스가 사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실, 로희를 지켜주려 하는 명준도 처음 로희에게 접근한 동기는 결국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똑똑한 로희는 이를 간파하고 "날 위해서라고? 웃기지 마. 아저씨 딸을 위해서잖아. 난 안중에도 없잖아. 처음 데려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날 걱정한 적 없잖아"(4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드라마 속 인물들은 로희를 이용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아마도 많은 시청자들은 이런 모습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인물들의 모습이 현실의 극단적인 버전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내 아이가 영재였으면, 공부를 잘했으면, 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돈을 잘 버는 직업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지, 그리고 그런 아이를 통해 내가 뿌듯해지기를 바란 적이 없었는지를 말이다. 아마도 아이가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기보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기를 바랐던 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느린 아이 빠른 아이 그리고 평범한 아이
그렇다면 왜 이들은 천재 아이를 그토록 바라는 걸까. 드라마에는 그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제이든과 최진태 박사의 유족들이 보여주는 물질에의 숭상, 과학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능력을 증폭시키려는 오만함, 그리고 내 아이가 나은 삶을 살게 하려는 욕망 등이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이 모든 욕망이 '착한 아이'도 '밝은 아이'도 아닌 '천재 아이'를 향하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바로 '느린 아이 혹은 빠른 아이'라는 표현이다.
8회에는 은선과 그의 딸 별이의 사연이 나온다. 별이를 영어 유치원에 다니게 한 은선은 유치원 원장으로부터 별이가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은선은 아이가 힘들어한다는 말을 듣고도 "사례를 하겠으니 별이에게 신경을 써달라"고 읍소하고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려요." 이에 충격을 받은 은선은 동료 의사에게 별이를 평가받게 하고 "인지능력이 낮고 과잉행동이 나타난다"는 진단을 받는다. 은선은 '느린', '인지능력이 낮은' 이 표현들에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로희 프로젝트를 완수해 자신의 딸을 '빠른', '인지능력이 높은' 아이로 바꾸는 데 집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