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에코스틸컷
제15회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영화는 멀리 보면 단조롭고 가까이 보면 흥미진진하다. 우리네 일상이 그러하듯이. 영화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몇몇 가정은 대개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사내들은 모두 나가 있고, 남은 것은 남은 이들이 해결해야 한다.
옥수수 가루를 내어 반죽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만드는 것만 해도 한참이 가는 일거리다. 가축을 치고 부업을 하고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는 것으로는 태도 나지 않는다. 뼈 빠지게 일해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삶 가운데 엄마는 지쳐만 간다.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겼을까 싶은 딸은 엄마의 일을 조금씩 넘겨받는다. 할머니를 씻기는 게, 가축을 돌보는 게, 빨래며 청소를 하는 게 모두 그런 일이다.
어떤 아이는 남달리 영민하다. 인형들을 앉혀두고 메머드와 멸종에 대해 강의하던 소녀는 다음 어느 장면에선 학교 교실에 앉아 소리와 그 소리를 전하는 매질, 음의 파동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아이들의 그 깊은 이해와 열정을 지켜보고 있자면 이들이 어째서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없는가를, 멕시코와 북미와 전 세계가 깊이 얽힌 교육기회의 불공정을 생각하게 된다.
누구의 자식이며 손자로 태어나 성공을 돈으로 사는 이들을, 제 앞에 널린 기회를 전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을, 기울어진 운동장을 악착같이 기어오르는 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이지 안타까운 건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에겐 흔한 기회에조차 닿지 못하는 이들의 사정이다. 바로 그러한 사정이 <엘 에코> 안에 아무렇지 않게 담겨 있다. 이들에겐 그와 같은 기회의 단절 또한 일상인 것이다.
어떤 아이는 서럽다. 남달리 말을 좋아하는 소녀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털을 빗기고 콧등을 쓰다듬는다. 말의 머리를 끌어안고 가만히 서서 저의 꿈을 속삭인다. 말 등에 올라 우랴앗 하고 소리를 치고 달리는 말 위에서 깔깔깔 환호하는 아이다. 그것이 소녀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리라고 나 아닌 영화를 보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아이가 엄마 몰래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며칠 뒤 열리는 작은 경주대회에서 기수로 출전하기로 한 것이다. 말이 있고, 저는 말을 탈 줄 아니, 조건은 충족됐다 하겠다. 넘을 것은 오로지 엄마의 반대뿐인데, 소녀는 끝끝내 그 반대를 넘지 못한다.
이 마을에 소녀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일을 잘 하는 이가 없다. 이 마을에 소녀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일을 좋아하는 이가 없다. 소녀가 소녀가 아니었다면, 소녀가 조금은 더 여유 있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소녀가 집에서 엄마의 일을 도와야 하지 않았다면, 소녀가 사내여서 말을 타는 일이 자랑이 될 수 있었더라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이 가난한 마을의 소녀여서 마을을 떠나야 한다. 엄마는 이 가난한 마을의 엄마여서 딸을 잃어야 한다. 영화는 그러나 이 또한 이 마을의 일상으로, 언제고 있을 수 있는 일로써 담담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그려낼 뿐 주장하지 않는 이 이야기로부터 나는 어째서 누구에겐 꿈이 죄가 되어야만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의 삶을 생각한다